<챕터 18>
쪽지에 적혀있던 숫자는 경도와 위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알프스산맥 어딘가의 숲속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위성지도로 확인해 보아도 숲밖에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곳에 누가 있을 것인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L을 필요하다고 판단한 S와 신죠 컴퍼니가 그의 신원 보장을 했고, 신분을 보장받은 L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밀입국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너무나 쉽게 불법 이민자를 풀어주는 것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A는 신죠가 마음을 먹으면 이 정도의 위법행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망설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제 남은 유일한 단서마저 사라져 버리기 전에, 최대한 빨리 그곳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S는 자신의 자원들을 빠르게 동원하기 시작했다.
수행원들과 함께 검은색 SUV 두 대에 나누어 탄 그들은 지도 위에 찍힌 한 점을 향해 다가갔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산속을 달리면서 세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깊은 숲속 한가운데에 있는 외딴 오두막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A와 S, 그리고 수행원 둘은 차에서 내려 이 작은 오두막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L과 또 다른 수행원 둘은 차에 남아있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이곳으로 찾아오라는 듯이. 수행원 중 하나가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문은 열려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손님이 많이 올 것 같군.”
자그마한 집 안은 커다란 책상과 수북하게 쌓여있는 서류들로 가득 차있었다. 벽난로 앞에서 불을 지피고 있는 자그마한 노인이 인사를 대신하며 말했다. 벽난로 옆에 쌓여있는 장작더미에 비해서 지나치게 왜소한 사람의 그림자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상하게 안광을 내뿜는 작은 노인이 그들을 돌아보는 순간, 그 사람이 오승호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앉게. 꽤 긴 이야기를 해야 하니.”
“오승호 박사님. 저희는...”
A가 자신들의 소개를 하려 하자 오승호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네. 신죠 컴퍼니에서 온 것 아닌가? 마코토 회장은 매스컴에서 가끔 보곤 했었지.”
오승호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소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A와 S는 한구석에 놓인 소파에 걸터앉았다. 오래된 나무 냄새가 묘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오승호는 방금 끓인 물을 컵에 담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차 한잔하겠나?”
A와 S는 고개를 저었다. 태평하게 차를 마실 만큼의 심적 여유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쉽네. 좋은 차인데 말이지. 내 고향에는 이런 게 없어서.”
그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한참 동안 손에 쥔 찻잔을 어루만졌다.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 같았다. 이미 준비되어 있던 말들이었지만, 직접 입에서 꺼내는 것은 처음이었던 오승호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시작될 이야기의 끝은 어떠한 결말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하지만 이내 오승호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던, 각오는 되어 있었다.
“나는 70년 중반 때부터 생화학무기로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를 연구했다네. 주변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질병에 죽어가는 게 싫어서 관심을 가졌었지만, 조국이 원하는 것은 좀 달랐어. 생화학무기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폭탄이기 때문이었지. 건물이나 인프라 시설을 파괴하지 않고, 오직 사람만을 제거할 수 있는...”
오승호는 차를 호로록거리며 마셨다.
“당시 북한은 러시아와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협력 관계에 있었는데, 사실 러시아가 북한에게 손을 내민 것은 남한과 일본에 대한 견제를 북한이 맡아줬으면 하는 거였지. 러시아는 당시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를 향해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했을 테지만, 실제로는 중국, 북한과 손을 잡고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조용히 무기를 만들고 있었지.”
오승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몸 안에 있는 생명이 새어 나오는 듯한, 긴 한숨이었다.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생화학 무기였다네.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터지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으면서도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그런 폭탄 말일세. 그리고 2010년에 우리는 그 바이러스를 발견했다네. 러시아 북서부의 얼음들 속에서 찾아냈지. 온난화로 만년설이 녹으면서, 얼음 속에 있던 포유류의 내장에서 그것을 발견했지.”
잠시 머뭇거린 오승호는 말을 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인류의 조상들과 함께 살았었던 것 같아. 일부 대장균에 기생하며 살아갔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DNA 정보를 세균에게 주입해서 숙주의 방어 체계를 단단하게 만드는 바이러스, 박테리오파지였다네.”
잠시 한숨을 내쉰 후, 오승호는 결심을 한 듯 말을 내뱉었다.
“우리는 그 박테리오파지에 스위치를 달기로 했지. 바이러스가 살아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박테리아에 붙어 있다가 어떤 방아쇠로 인해 이 바이러스가 죽게 될 경우 박테리아가 독성을 띌 수 있게 설계를 했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동시에 퍼트릴 수 있는 치명적인 무기가 될 테니 말일세. 그리고 그 바이러스의 자폭 명령은 호르몬을 통해서 전달하도록 되어있어. 그것은 실험 중이었던 기술이었다네. 만약 사람들의 몸에 그들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는 폭탄을 몸 안에 심어놓고, 그 스위치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그것만큼 효율적인 무기가 어디에 있겠나.”
A는 떠오르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만약 그렇게 통제가 가능했다면, 옐로우 사태는 왜 터진 거죠?”
“그건 나도 몰라. 추측건대, 핀란드에 있었던 연구소에서 진행했던 연구 중에 활성화된 세균이 유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네. 사실 바이러스 때문인지, 박테리아 때문인지도 확실하지가 않아. 확실한 건 핀란드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 슈퍼 박테리아였다는 것 정도지. 2020년 당시에 핀란드 백신 연구센터에서 내가 가지고 망명했던 자료와 샘플들을 가지고 했던 실험들이 있었네.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항생제 내성 박테리아에 박테리오파지를 부착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던 거였겠지. 아니면 정말로 그들이 완성한 건지도 몰라. 그 바이러스를 이용해서 평범한 박테리아를 슈퍼 박테리아로 변화하게 만드는 기술을 말일세. 난 분명 경고했었어. 이건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고. 하지만 연구 자료를 넘겼을 때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
모두의 욕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욕심이 전 세계 인구를 반으로 줄였다.
“우린 러시아에서 수많은 실험체에 특정 페로몬을 낼 수 있는 실험을 계속했다네. 갑상선, 시상하부, 뇌하수체 등등 어디가 되었든 상관없었지. 약물이든 전기든, 다양한 자극으로 기관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면 특정 호르몬을 분비할 수 있게 되지만.”
오승호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부작용은 잘 알걸세. 감각을 잃거나, 말을 못 하게 되거나, 미쳐버리거나, 죽게 되지...”
오승호는 다시금 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A는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오승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오는 내 딸이 아니라네. 유일하게 그 스위치를 단, 살아남은 아이야. 이제 왜 모두가 그 아이를 그렇게 찾아다녔는지 알겠지. O가 그 방아쇠야. 2019년에 폭발한 러시아의 생체실험실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트리거일세...”
오승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스스로도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곱씹어 보고 있었다. 비록 그가 직접 인체 실험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한때 그는 그 모든 희생이 조국을 위해서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려 애쓰기도 했었지만, 연구소의 폭발과 함께 자기 기만을 멈추게 되었다.
“실험체 명이 O-01이었던 아이였네. 꽃제비들이었어. 주로 북한의 부모 없는 아이들을 잡아다가 실험을 했었지. 특히 8, 9세 아이들이 주 실험 대상이었다네. 아직 뇌 조직이 견고해지기 전, 전기 자극에 쉽게 시냅스 구조가 변할 수 있는 아이들이 주 실험 대상이었다네. 그리고 그 스위치는 O의 시상하부 뇌하수체에 있다네. 그걸 꺼내야 될걸세. 백신을 만들던, 트리거를 만들건, 이 바이러스를 컨트롤할 수 있는 페로몬을 가지려면 O의 뇌에서 직접 추출해야 한다네. 아마 한 번에 성공할 리 없으니 계속해서 추출을 해야겠지... 그렇게 사느니 아마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아니, 실제로 그 과정 중에 죽을 확률이 더 높겠지만...”
A는 갑작스러운 사실들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신죠는 입을 열어 함께 온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이 이상의 정보를 굳이 A에게 들려줄 필요가 없었다고 판단한 듯했다.
“우리 연구소로 모셔.”
“아니. 난 가지 않겠네. 당신들이 뭘 하는지 난 알아. 구호 활동을 하는 척하지만, 자네들이 뭘 하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다네. 우리가, 아니 내가 그랬었으니까.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실험을 나는 얼마나 했을 거 같나? 그건 완성된 기술이 아니야. 더 이상 그런 짓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오 박사는 에이치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그나마 멀쩡한 인간인 것 같군. 저 친구가 이제 뭘 원하는지 알겠지?”
에이치로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그는 신죠를 바라보았다.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깨끗한 얼굴. 항상 감탄했던 신죠의 매끈한 얼굴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아무런 표정도 변하지 않은 채, 신죠는 감정 없는 눈빛으로 에이치로와 오승호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옆에 서 있던 경호원에게 손짓했다. 경호원은 손을 품에 넣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꺼내려 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창문이 깨지며 신죠의 양옆에 서있던 경호원 둘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벽에 튄 뇌 조각이 바닥으로 채 흘러내리기도 전에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다.
“그랬었군요. 잘 들었습니다.”
당황해서 자세를 낮춘 에이치로의 시야로 하얀 위장복에 선글라스를 낀 두 명의 건장한 사내가 들어왔다. 신죠는 오 박사를 끌고 책상 뒤로 몸을 숨겼다.
좁은 거실로 들어오는 한 사람의 실루엣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이상하리만큼 길고 마른 체형의, 항상 연구실에서 바라보았던 익숙한 동료의 모습이 겹쳐졌다.
“요한!”
에이치로의 외침에 마른 남자는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 손으로는 소음기가 달린 총을 겨누고, 한 손으로는 선글라스를 내렸다.
“오랜만이네. 에이치로.”
에이치로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품었던 의문의 조각들이 전부 맞춰짐을 느꼈다.
요한은 어떻게 에이치로가 항상 인스턴트와 레토르트만을 먹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는 항상 에이치로가 아플 때 대신 근무를 서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요한은 자신이 힘들어할 때마다 구세주처럼 나타나 그를 도와주었을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던 일이었다.
“날 미행하고 있었나?”
요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오승호 박사를 향해 말했다.
“닥터 오. 모시러 왔습니다. 함께 가시죠.”
오승호 박사와 신죠는 책상 뒤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진 (러시아어로 Один"아진"은 숫자 1)은 우리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오승호는 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러시아 쪽이었군.”
에이치로는 떠오르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자넨가? 센터장을 죽인 게? 도대체 왜?”
요한은 잠시 뜸을 들였다. 옆에 있던 그의 동료를 잠시 바라보고는, 이 정도의 시간은 할애해 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에이치로를 향해 말했다.
“처음부터 내가 센터에 온 이유는 울리히 때문이었어. 오승호와 실험체를 숨긴 게 울리히였으니까, 그를 관찰하면 오승호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어. 꽤 치밀하더군.”
요한은 이마를 찌푸렸다.
“도리어 한방 먹었었지. 샘플들을 밀반출하다가 검사에 걸렸었거든. 위생실을 통해서 샘플들을 빼내려고 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불시에 검사를 하더라고. 울리히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연구소 내에 스파이가 있다고 말이야. 다만 그게 누군지 확신이 필요했던 거지. 나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
아. 그래서 울리히가 처음에 나를 세균실에 배치했던 거였나.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 세균 실험실에 아시아인을 넣을 이유가 뭐가 있었을까. 세균실 내의 스파이 색출을 하기 위한 미끼였나. 혹은 나도 스파이라고 생각했던 것인가.
“그러던 중 자네가 갑자기 우리 팀으로 들어왔지. 자네가 나와 연구원들에 대한 리포트를 별도로 쓰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네. 울리히의 지시였겠지. 이해한다네.”
요한은 갑자기 뭔가를 눈치챈 듯 신죠와 오승호가 숨어있는 책상을 향해 소리쳤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저 친구들처럼 이마에 바람구멍 나고 싶지 않으면. 여긴 이미 우리들이 둘러싸고 있으니까 허튼짓 하지 말고 손들고 나와.”
요한의 동료가 신죠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뺏기 위해 다가갔다.
“사실 난 상관없어. 내게 주어진 미션은 오승호와 O를 회수하라는 것이었지, 자네까지 죽이라는 건 아니었으니까. 에이치로. 눈치챘겠지만 자네 신발에 위치 추적장치가 달려 있다네. 자네에게 유감은 없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내 취향은 아니야. 그저 오 박사와 샘플을 가지고 러시아로만 넘어가면 된다네. 자네 둘은 그때까지만 조용히 묶여 있어주면 돼.”
에이치로는 뭔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배신감에 몸이 떨렸다. 자네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에이치로가 요한을 향해 뭐라고 외치려고 하던 그 순간이었다. 요한의 동료가 휴대전화를 손에서 낚아채던 그 순간, 신죠는 총을 든 그의 팔을 잡아 꺾었다. 그리고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그의 꺾인 손에 쥐어진 총을 틀어 적의 복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는, 빼앗은 총을 요한을 향해 겨눴다. 요한 또한 에이치로를 향하고 있던 총구를 신죠를 향해 돌렸다.
10분 전. 리웨이는 신죠의 경호원들과 함께 타고 온 차량 근처에 있었다. 눈이 쌓인 산등성이에서 먼 산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쉬었다. 어린 시절 자신이 아버지와 머물렀던 숲속이 생각났다. 겨울을 나기 위한 수렵은 특히 괴로웠다. 모든 동물들은 혹독한 겨울을 살아남기 위해서 죽이거나 죽었다. 그 역시도 살아남기 위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동물들을 잡아야만 했었다.
갑자기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이 리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무엇인가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리는 볼일을 보는 척하며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신죠의 경호원이 볼일을 보러 간 중국인이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그들은 피를 뿜으며 하나씩 쓰러졌다. 하얀색 옷으로 은폐한 다섯 명이 주위를 경계하며 오두막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리웨이는 눈 속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 중 둘이 오두막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리는 오두막 밖의 위험인물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적들의 시선이 온통 오두막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쏠려있었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게 밖의 세 명을 제압할 수 있었다.
창문 너머로 오두막 안의 상황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으로 들어간 두 명과 신죠 일행들이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신죠와 요한은 서로를 향해서 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먼저 총을 쏜 것은 요한이었다. 신죠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 리웨이는 요한의 목을 향해 칼을 집어던졌다. 에이치로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했지만, 곧 요한에게 달려갔다.
요한의 손에서 총을 치우고 상태를 살폈다. 리가 집어던진 칼은 요한의 목, 경동맥에 꽂혀있었다. 요한은 몇 분 이내에 죽을 것이다. 에이치로는 흘러나오는 피를 옷가지로 틀어막으며 말했다.
“O는 어디 있나.”
요한의 입에서 피거품이 올라왔다. 이제 틀렸다.
“제발 말해주게...”
<에필로그>
그 병은 외딴 남유럽의 시골 마을에서부터 발병했다. 2022년, 아시아에서의 비극은 다시 재현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유럽을 중심으로 발병이 되었다는 것과 대륙에 국한되지 않고 중동과 아프리카, 그리고 호주까지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 정도였다. 마치 흑사병이 재현된 것처럼 질병이 번져 나갔지만,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유럽 백신 연구센터를 중심으로 개발된 백신이 빠르게 보급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질병의 확산 속도를 백신의 수량이 따라가지는 못했다. 다시금 세계는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날 이후 6개월 뒤, 에이치로는 다시 백신 센터로 돌아왔다. 지나간 비극을 뒤로하고 예견된 비극을 준비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연구가 되어 보급되었던 슈퍼 박테리아용 항생제와 슈퍼 박테리아를 사멸시킬 수 있는 표적 박테리오파지를 배양 시키는데 온 에너지를 쏟았다. 핀란드와 중국에 있던 신죠 컴퍼니의 연구센터의 자료와 오승호 박사가 넘겨줄 자료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신죠 컴퍼니는 대표를 잃었음에도 표면상 변화는 없어보임. 정부 기관들과의 연계가 활발해지고. 어쩌고.
에이치로가 센터에 돌아올 수 있도록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은 에드워드였다. 그는 울리히 다음 센터장으로 역임되어 있었다. 에드워드는 에이치로와 다시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난 별로 알고 싶지 않다네. 에이치로. 난 그냥 지금처럼 모른 채 지내는 게 더 좋을 거 같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어쩌다 보니 다음 센터장을 맡게 되었어.”
에드워드는 에이치로가 지난 몇 달간 인터폴과 유로폴리스에게 취조 당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도 취조의 대상이었기에 유로폴리스 센터를 드나들면서 에이치로가 러시아 스파이 살인사건에 바이러스 사건, 밀입국자 실종사건 등 여러 방면에서의 중요 참고인으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모든 사건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데에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에이치로 역시 수사 과정에서 조사관에게 에드워드의 근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에드워드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변을 책임지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꽤나 감동했었다. 백신 센터 총괄 책임자 자리에 에이치로를 적극 추천한 것도 에드워드였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그 친구 일 하나는 할 말 없게 잘하니까요.”
에이치로는 계속해서 지속한 야근에 노곤해진 몸을 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여전히 엉망진창인 냉장고에서 캔 맥주 하나를 꺼내고 거실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몸을 뉘었다. 거실 천장에 매달려있는 전등이 깜빡거렸다. 마치 취조실 천장에 달려있던 형광등처럼 간헐적으로 불이 꺼졌다 켜졌다. 소파 옆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푸른색 물결을 그린 그림이 조명에 반사되어 너울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에이치로는 그 그림을 바라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덮은 눈꺼풀 위로 희미한 빛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 칙 -
적막한 그의 방에 캔맥주 뚜껑을 따는 소리는 꽤나 크게 울려 퍼졌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동안의 조사에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날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요한은 숨을 거두기 직전 피 묻은 손가락으로 짧은 단어를 바닥에 적었다. Fod. 요한의 눈을 감기고, 에이치로는 리웨이와 함께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료공장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요한이 남긴 단어는 fodder (사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나부끼는 유색인종 입장 금지 포스터들과 낙서들. 말은 서로 통하지 않지만, 에이치로와 리웨이는 알 수 있었다. 그들 둘 이외의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낡은 사료 공장 안에는 두 명의 총을 든 사내들이 O를 지키고 있었다. 에이치로는 공장 밖으로 나가 경찰을 부르려고 했다. 조용히 뒤로 돌아서려는 에이치로의 어깨를 리웨이가 붙잡았다.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들어 입술 위에 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당황한 에이치로가 멈칫거리는 사이에 리웨이는 녹슨 기계들 더미의 그림자 뒤로 사라졌다. 에이치로는 숨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리웨이는 그림자 사이로 숨어들어 가죽점퍼를 입고 총을 들고 있던 사내의 뒤를 밟았다. 소리 없이 접근해 뒤에서 입을 틀어막고 갈비뼈 사이로 칼을 끼워 넣었다. 남자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속절없이 쓰러졌다. 첫 번째 사내가 쓰러지는 것을 파악하기도 전에, 두 번째 사내는 자신이 무엇에 맞았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O는 리웨이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윽고 쭈그려 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O를 껴안는 리웨이를 보고 에이치로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에이치로는 엉뚱하게도 리웨이와 O가 좋은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가족이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리웨이는 좋은 아버지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너무 중요한 재료다. 언제 퍼질지 모르는 전염병을 막을 수 있을 단서이기에, 에이치로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려고 애썼다. 에이치로가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신호가 미약했지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떻게든 경찰에 연락을 하려고 했다. 에이치로가 핸드폰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 리웨이가 갑자기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피 묻은 칼끝을 에이치로에게로 향했다. 에이치로는 리웨이을 바라봤다. 이 협박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그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한다면, 리웨이는 망설이지 않고 찌를 것이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리웨이는 에이치로를 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리웨이가 에이치로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말했지만, 에이치로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참을 울던 O는 리웨이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리웨이와 O는 에이치로를 향해 목을 까닥거리고는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밖은 눈바람이 불고 있었다. 에이치로는 리웨이와 O가 눈바람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한없이 지켜보았다.
Ⓒ 고재욱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