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우>
<프롤로그>
2020년 여름. 올해는 그 어느 해의 여름보다도 더웠다. 미국과 중국은 작년부터 시작된 경제 전쟁을 가속하다 못해 공멸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그 여파로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세계 경제는 이제 거의 성장을 멈춘 듯이 보였다. 중국과 미국에 수출과 생산을 의존했던 대부분의 제조 선진국들은 이제 두 손을 놓은 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대공황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의 꽃이라 불리는 하계 올림픽은 도쿄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방사능에 대한 세간의 우려는 그렇게 사그라졌다. 한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선수들의 출전을 우려한다거나, 자국의 선수들의 건강을 위해 물과 식료품을 전량 자국에서 보냈다는 이슈들은, 패럴림픽이 끝나기도 전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일상으로 돌아갔고, 나 또한 이 지긋지긋한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진료실에 앉아서 환자들을 대하고 있었다.
“한여름인데 갑자기 감기 환자들이 많이 오시네요.”
김 간호사가 환자 예약 차트를 가져오며 말했다.
“냉방병인가 보죠.”
차트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거의 대부분 노인분들이다. 아마도 밀폐된 실내에서 에어컨을 오래 쐬었거나 무리한 야외활동 이후 지나치게 낮은 온도의 실내에 들어가는 일들이 반복되었겠지. 지난주부터 급격히 늘어난 환자분들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사실 이 증세에는 뚜렷한 처방전이 없다. 포도당 주사와 혹시 모를 독감 바이러스 백신 주사 정도를 처방하는 것 외에는, 이런 외딴 시골에 있는 보건 진료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처음에 이곳에 배정받아 온 날이 생각났다. 군사훈련을 마치고 공중보건의의 자격으로 섬에 배치되었다가 2년 차 재배치 기간에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나름 현대식으로 진료소와 숙소를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큰 불만은 없다. 살아오면서 내 삶에 그렇게 뭔가가 제대로 갖춰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의대 입학 시절에서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먹었던 기억이 없었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딱히 굶었던 기억은 없는데, 그렇다고 딱히 뭘 만들어 먹은 기억도 없었다.
‘난 대체 뭘 먹으며 살고 있는 거지.’
아까 간호사들과 먹었던 된장찌개는 김 씨 할머니가 많이 만들었다고 가져다주셨고, 어제저녁에 숙직실에서 막걸리와 함께 먹었던 파전은 최 씨 할아버지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마을 주민들과 그다지 살갑게 지난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떠올려보면 주민분들이 가져다주신 밑반찬과 음식들로 연명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자 새삼 시골 인심이 이런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생각보다 시골의 보건 진료소가 나에게 잘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어쨌든 2년을 채우면 난 이곳을 미련 없이 떠날 것이다.
“박 선생님! 긴급 환자에요! 진료실로 빨리!”
식곤증 때문에 잠시 잠이 들었나 보다. 김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에 약간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워낙 사소한 일에도 크게 놀라는 사람이라 이제는 그다지 대수롭지는 않았다.
“네. 네. 지금 갑니다.”
인터폰도 없는 이곳에서는 이렇게 외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채기 어렵다.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걱정 많은 김 간호사의 핀잔과 하소연을 듣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며 털레털레 진료실로 걸어갔다.
한눈에도 상황은 좋지 않아 보였다. 김 간호사는 환자용 침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의 맥박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침대 옆에는 혼자가 게워낸 것으로 보이는 토사물들이 보였다.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까지 있었던 고만고만한 사고가 아니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를 업고 온 것으로 보이는 사내 역시 안절부절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환자의 호흡을 확보하기 위해 입안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삽관을 하며 사색이 된 사내에게 물었다.
“저도 모르겠구먼요. 멀쩡하게 티브이를 보시다가 갑자기 옆으로 쓰러지셨는데...”
환자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혈압이 갑자기 떨어지고 체온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으며, 구토와 설사, 쇼크로 인해 의식을 잃은 상황이었다. 전형적인 패혈증 증세였는데, 환자의 나이가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작은 시골 보건 진료소인 이곳에서는 그다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황급히 항생제를 투여하고 근처 도시의 병원으로 응급 요청을 보냈다. 그 사이 심정지가 온 환자에 제세동을 시행하였으나, 이러한 노력이 아무 쓸모도 없는 행동이라는 것은 심폐 소생술을 하고 있는 내가 가장 잘 알 수 있었다. 이런 응급상황은 2년 차 공중보건의에게는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삐-
애꿎은 기계음만이 응급실에 울려 퍼졌다. 김 간호사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어 말리기 전까지, 나는 넋이 나간 채로 환자의 가슴뼈가 부러지도록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지만, 멈춰버린 심장은 다시 뛰지 못했다.
사망 선고를 할 정신도 없어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방금 사망한 할아버지가 마을 이장인 황 씨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마르시긴 했지만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이분이 평소 과하게 술을 마시거나 흡연을 하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다. 별다른 외상도 없었기에 뇌출혈이나 심장마비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래도 뭔가가 석연치 않았다. 패혈증이라면 세균이나 바이러스 감염일 테지만, 이곳 진료소에서는 혈액검사를 하더라도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 없기에, 우선 상위 대학병원에 환자의 감염 여부 및 패혈증 원인 분석을 요청해야 한다. 망연자실해 있는 간호사들 사이에서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응급실에 퍼지는 토사물 냄새가 더욱 머리를 아프게 했다. 차라리 소독약 냄새가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차였다.
“응급 환자입니다!”
경찰 복장의 건장한 남성이 깡마른 할머니를 등에 업고 다급히 병원으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에서 묻어 나오는 다급함이 방금 전 한 사람을 떠나보낸 이곳의 적막함을 밀어내고 있었다.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온몸을 감싼다. 싸늘한 죽음의 냄새가 다시금 이 작은 시골 진료소를 감싸고 있었다.
두 번째 환자였던 박 씨 아주머니 역시 첫 번째 환자였던 황 씨 아저씨와 똑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미 사망한 황 이장을 이송하기 위해서 요청했던 응급차량이 도착하여 아주머니를 태워 보낼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살아날 것 같지는 않았다. 박 씨 아주머니와, 그녀와 함께 왔던 순경을 실어 가는 응급차량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벌써 해가 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안실이 갖추어져 있는 병원으로 고인을 모시기 위해 119를 부르고, 고인의 보호자인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황 이장을 업고 온 최 씨에게 말을 걸었다.
“이장님 가족이라고는 따님뿐일 것인디… 그 외 얼마 전에 결혼한다고 남편 될 사람이랑 왔던…”
문득 기억이 났다. 마을회관에서 무슨 잔치를 한다고 했었지.
“그 따님분도 지금 이 동네에 안 계시지라. 연락처를 알 만한 사람이…”
최 씨의 말에 따르면 황 이장의 딸은 외국에서 유학 중이라고 했다. 바로 며칠 전, 결혼할 사람이랑 같이 인사를 드리러 들렀다가 곧바로 다시 떠났다고 했다.
잠시 망설였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을 내의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황 이장의 보호자를 찾는다는 신고를 한 뒤, 응급차가 고인이 된 황 이장과 참고인인 최 씨를 모시고 갈 때까지 진료소 복도를 서성였다. 나름 냉정해지려고 애썼지만 아마도 오늘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핼쑥해진 김 간호사를 집으로 보내고 숙직실의 소파에 드러누웠다.
선배들에게 듣게 되는 시골 공중보건의의 무용담들이 떠올랐다.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마을에서 갑자기 피 칠갑을 한 마을 할아버지가 쓰러져 들어온다든지, 농약을 마신 신변 비관자가 갑자기 실려 왔을 때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지난 2년간 별다른 일 없이 지나왔었는데. 기껏해야 트랙터가 도랑에 빠지는 바람에 다친 마을 청년의 사례가 내가 겪은 가장 큰 사건이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망자라니.
해가 저문 시골의 한적함이 숨 막히는 적막함으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숙직실에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서 보건소 밖으로 나와 동네를 정처 없이 걸어갔다. 아마도 내일은 파출소에 참고인으로 다녀와야 하지 않을까. 외국에 있다는 황 이장의 딸에게는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온갖 잡다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불어났다. 아까까지 멈춰있던 뇌가 이제는 지나치게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차였다. 문득 동네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 동네가 이렇게 조용했었나?’
이상한 적막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풀벌레, 개구리 소리는커녕 동네 개들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름밤에 불어오는 뜨듯한 바람이 살갗을 훑고 지나갔다.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동네 슈퍼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간까지 웬일이지 싶었지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맨 정신에 숙소로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술이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슈퍼로 향했다.
“계세요?”
열려있는 유리 미닫이문을 들어서며, 벌레가 계속 들어오는데 문을 닫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음료 냉장고 역시 열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냉장고 문에 물방울이 가득 맺혀있는 걸로 봐서는 열어 놓은 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소주 두병을 꺼내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아주머니. 계산 좀 해주세요.”
과자 봉지 몇 개를 주워들었다. 평소라면 느릿느릿 걸어 나오셨을 주인아주머니가 통 나오시질 않는다. 조금 더 큰 소리로 불러야 하나. 방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작은 나무 미닫이문을 바라봤다. 손때가 타 반들거리는 나무 프레임에 간유리가 끼워져 있는, 간유리 너머로 방안의 불빛이 은근히 비치는, 그런 미닫이문이었다. 오래된 브라운관 TV의 불빛과 소리가 미닫이문 너머로 번져 나오고 있었다.
“아주머니. 계산이요.”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미닫이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에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을 더 두드린 끝에,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가 싶어서 손에 들었던 소주와 과자 봉지를 제자리에 내려놓으려고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간유리 너머의 그림자가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TV 브라운관에서 나온 불빛의 모양이 묘하게 ㄱ자를 그리고 있었다. TV 브라운관에 사람의 머리가 기대어 있어서 브라운관에서 나온 빛을 가린다면 저런 모양이 되지 않을까. 섬뜩한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 엉뚱한 생각이 엉뚱한 생각으로 끝나길 바라며 미닫이문으로 다가갔다. 잠시 망설였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미닫이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생각보다 문이 뻑뻑해서 쉽게 열리지 않았다. 손에 힘을 주어 옆으로 밀었다. 덜컹하는 소리를 내며 미닫이문이 갑작스레 밀려서 열렸다.
“쨍그랑.”
손에 들고 있던 소주병 하나가 땅에 떨어져 깨졌다. 슈퍼 아주머니는 브라운관에 얼굴을 기댄 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방구석에서는 선풍기가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고, 바닥에는 찐득해 보이는 무엇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디서 꼬였는지 날파리 몇 마리가 그 위를 앵앵거리며 날고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무심하게 날아와 내 이마에 앉을 때까지 나는 눈을 깜빡일 수조차 없었다.
마을 이장이었던 황 씨 아저씨가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지고 난 뒤, 마을 사람들 전부가 쓰러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일주일이었다. 고작 일주일 만에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쓰러졌고, 고열과 저혈압성 쇼크, 구토와 설사 증세로 죽어갔다. 이건 지금까지 본 어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보다도 전염성이 높았으며, 치사율 또한 지나치게 높았다. 질병관리본부가 나서서 역학조사를 시작한 시점은, 나 또한 감기 혹은 냉방병 증세를 보이며, 이다음에 덮쳐올 원인 모를 패혈증에 대한 공포에 두려워 떨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챕터 1>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A의 눈은 반사적으로 떠졌다. 온몸에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A는 마치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귀찮을 일을 어쩔 수 없이 처리하는 집사처럼 말하는 알람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어나실 시간입..”
반복되는 기계의 알림을 끝까지 듣고 싶지 않았던 A는 신경질적으로 알람 버튼을 누르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간밤에 꾼 꿈을 떠올려보려 했다. 1년 전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버지 모습과 부패되어 퍼렇게 변한 어머니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시체가 쌓여있던 병원 앞 주차장에서, 그는 하얀 방호복을 입고 그의 부모와 마주하였다. 얇은 폴리에스테르 천 너머로 느꼈던 메마름이 다시금 느껴졌다. 그가 공부하고 있던 스위스에서 급하게 비행기를 잡으려 했지만, 대부분의 항공사들은 아시아행 항공 노선을 거의 다 취소한 뒤였다.
전염병이 창궐한 그 해, 그를 비롯한 대다수의 아시아 유학생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스크린으로 밖에 확인할 수 없었다. 그가 간신히 그의 고향이었던 도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운 좋게 그와 같은 클래스를 다니던 일본 대기업 3세인 S가 자신의 전세기에 A를 비롯한 일본인 유학생들을 태울 수 있는 심적, 물질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비롯한 대다수의 아시아 국가들이 붕괴해가고 있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축제의 도가니였던 도쿄가, 지금은 죽음만이 가득한 그 무엇이 되어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고, 들개와 고양이들은 그 시체들을 파먹으며 살아가고 있었고, 그나마 최후의 보루처럼 병원과 공항, 군사시설과 연결되어 있는 최소한의 인프라들에서는, 하얀 방균복을 입은 채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몇몇의 사람들의 그림자만을 볼 수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구호의 표시로 여겨지는 청십자 깃발이 나붙기 시작했으며, A가 미처 자신의 심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그의 가족들은 불태워졌다. 거의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그 상황 속에서도 A는 S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고마워.”
남에게 신세를 지면, 그것이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감사를 표하라고 A의 어머니는 A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쳤었다. A는 부모의 시신을 수습해 준 S에게, 정확히는 A의 부모님이 입원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던 병원을 찾아 시신을 수습해 준 청십자 직원들을 대표하는 S에게 말했다.
“뭘.”
S는 기계적으로 말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이제 A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스위스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 삼엄했던 방역 가이드의 사람들이 왜 S와 S의 직원들에게는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는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곧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
아름답게 휘날리던 벚꽃과 환호하는 사람들, 뜨거운 한여름 햇살 아래 빛나던 근육과 땀을 떠올렸다. 전 세계 사람들이 도쿄에 모여 벌였던 한낮의 축제를 떠올렸다. 후쿠시마의 비극에서부터 해방되었음을, 건강하고 아름다운 일본으로 완벽하게 돌아왔음을 알리던 화려한 축포 소리를 떠올렸다.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A는 다시 눈을 떴다. 면전에서 빈정거릴 E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A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봐, 곤니치와. 얼굴이 왜 그러나?”
E는 빙긋 웃으며 A에게 말했다. 말끔하게 멘 넥타이와 하얀 연구 가운. 앞머리가 조금 벗겨졌지만, 말끔하게 빗어 넘긴 금발 곱슬머리를 자랑스럽게 매만지면서 E는 생각했다.
‘일본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그냥 잠을 좀 설쳤습니다. 괜찮아요.”
A는 평소의 무표정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가능하면 연구실로 들어가기 전에는 평정심을 되찾고 싶었다. 랩 3팀. 날마다 들어가는 생화학 실험실이지만, 그때마다 스산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봐. 무리하지 말라고. 아무도 자네한테 그렇게 큰 무게를 지우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네.”
E는 짐짓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A에게 말했다. 그래. 굳이 아시안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이유가 없지 않나? 나름의 사명감도 좋지만,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괜찮습니다. 치프 에드워드.”
A는 아침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안부를 빙자한 비웃음을 던지는 상관과 함께 있는, 이 불편한 상황을 견뎌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라는 자기 확인이라도 하듯, A는 E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이고는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했다.
“그 어떤 때보다 좋은 컨디션이에요.”
실험실 안에서는 J가 실험기구들을 꺼내고 있었다. 선반 위에서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시약들을 집는다.
“구텐 모르겐. 에이치로.”
“구텐 모르겐. 요한.”
J는 A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긴장하지 말라고. 아침은 먹었나?”
독일인 특유의 딱딱한 음성이었지만, A는 그 목소리가 싫지 않았다. 올 초에 센터로 와서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A는 J가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졌다. 형제가 있었다면 아마도 이런 느낌이겠지. 다른 연구원들이 은근히 A를 따돌리기에, 항상 먼저 다가오는 J가 내심 고마웠다.
“긴장돼.”
A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 없다. 오늘부터 그가 그토록 원했던 변종 STEC(shiga toxin-producing Escherichia col, STEC, 시가독소생성 대장균)를 분석하기 시작할 것이다. 배양실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저 박테리아의 genomic) DNA를 분석한 뒤, 항생제 내성 유전자를 전달시키는 방식을 찾아낼 것이다. 그것이 plasmid를 통해 전달되었든, DNA를 통해서였든. 이미 메티실린을 포함한 베타락탐계, 반코마이신 계열의 항생제에 이미 내성을 가지고 있고, 퀴놀론계 항생제와 엽산 합성 억제 관련 약물들에도 내성을 보이고 있는 이 악랄한 괴물을 낱낱이 해체해서 분석할 것이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허망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리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내 가족들을 눈앞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는 그때와는 다르다고 A는 다시금 되뇌었다.
갑자기 자신이 너무 열을 내고 있음을 느꼈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토록 잡고 싶었던 가족의 원수가 이제 내 손안에 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분노와 흥분이 번갈아 가며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A는 자신이 분자생물학을 선택하게 했다는 점에 대해서 신께 감사드렸다. 이 정체 모를 원핵생물을 연구하는 곳에 자신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감사드렸다. 이곳 유럽 백신 연구센터에 자신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떠한 숙명처럼 느껴졌다.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연구자로서, 그리고 복수자로서, 이 작은 살인마를 자신의 손으로 지구상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겠다고 A는 맹세했다.
“너무 그렇게 쏘아보지는 말라고. 증오와 애정은 한 끗 차이라고 하지 않나.”
농담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A는 J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쉽게 보내주기엔 빚을 너무 많이 졌지.”
J는 A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 친구 괜찮나?”
E는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J에게 말을 걸었다.
“센터장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그렇지 않아도 쉬어야 될 친구를 메인으로 올려놓고.”
넌지시 떠보는 E를 J는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에이치로는 잘 하고 있습니다만... 그 친구 건강이 걱정되기는 합니다.”
“특이 사항은 없나? 열심히 하는 거야 그 친구들 특기 아닌가.”
그 친구’들’. J는 E의 말이 거슬렸다.
“저희 모두 이번 연구 결과에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친구는 사연이 있으니까요.”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너무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나 하는 거지. 아무래도 그 ‘옐로우’니까 말일세.”
옐로우. 전 세계 인구를 반으로 줄인 전염병의 속어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발병 확률은 모든 인종에서 비슷하게 나타났다. 유전적 차이 때문에 발병 확률이 높다는 선입견이 생긴 것은, 아마도 이 전염병이 창궐하기 직전 극도로 치달았던,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과의 군비경쟁 및 무역전쟁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서구권의 시선이 만들어낸 환상 때문이었다. 게다가 발병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들이 지정학적으로 아시아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굳이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시아인들에 대한 차별과 배척은 이 전염병의 이명을 통해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흑인은 유전적 요인에 의해 백인보다 지능이 낮다’고 주장했던 J. 왓슨 같은 사람들의 인종적 차별이, 이제는 그 구부러진 화살의 끝을 노골적으로 아시아인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인종 차이에 의한 감염 정도에 대해서 증명된 것은 없지 않습니까?”
뜻밖의 대답에 E는 잠시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 새어 나오는 실소를 감출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고상한 척하기는. 위선적인 독일인 주제에.
“피해자 가족으로서의 심리에 대해서 말한 것일세. 인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물론 그러시겠죠. 능구렁이 같은 잉글랜드인 같으니.
J는 제임스 왓슨(DNA 이중나선 구조 모델로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생물학자. 게놈 프로젝트의 초대 책임자를 맡기도 했으나 인종과 지능에 대한 견해, 특히 2007년 영국 선데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사회적 정책은 흑인의 지능이 백인과 같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실험 결과는 그렇지 않다.”면서 “흑인 직원을 다뤄 본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라는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큰 논란을 일으키면서 과학계에서 퇴출됐다. 2019년 1월 2일 방영된 미국 PBS 다큐멘터리에서 “흑인과 백인 사이에는 평균적인 지능지수(IQ)의 차이가 존재하며, 그 차이는 유전자에서 비롯된다.”라며 자신의 견해에는 변함이 없다는 인터뷰를 했다.)을 떠올리며 E를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치프 에드워드.”
E의 얼굴 너머를 바라보며 J는 비꼬듯 웅얼거렸다.
“물론 치프께서 그러실 리 없겠죠.”
돌아서려던 E는 걸음을 멈췄다. 잠시간의 적막이 흘렀다.
“이봐. 요한. 그때는 아무 일 없이 그냥 잘 넘어갔지만 말이야.”
E는 찬찬히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이어갔다.
“아직도 ‘그때’의 누출 사고에 대한 조사는 종결되지 않았다네.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반짝이는 금테 안경 너머로 E의 가느다랗게 찡그린 눈이 J를 노려보았지만, J는 미동하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아무도 감염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균이 퍼지지 않은 게 아니라네. 그리고 그때 유출된 경위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세균실 스텝이었던 자네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란 점 항상 명심했으면 좋겠어.”
“…”
굳이 불리한 이야기는 이어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J는 입을 다물었다. 불과 5주 전의 박테리아 누출 사건. 어디에서 어떻게 새어나간 것인지 아직 확인된 바는 없지만, 그때의 사고로 실험실의 선임 연구원들은 모두 징계처분 받고 타 부서로 이동 배치되었다.
‘우연히’ 위생부서에서 시약 검사를 하던 중에 ‘우연히’ 밀폐실험실에서 연구 중이던 박테리아가 검출된 사건. 발견에서부터 사후 인사발령까지 석연찮은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스텝들 대부분은 상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자리가 빈 생화학 실험실 부서로 들어온 스텝 중 A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네는 참 독일인 같지 않단 말이야. 모쪼록 긍정적인 성과를 기다리겠네. 아참 그리고 자네가 에이치로와 근무시간을 자주 바꾸는 거 알고 있네. 그런 것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규정은 가능하면 지켜주게.”
E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J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때의 석연치 않은 기분을 다시 느껴야만 했다.
<챕터2>
L은 폐허로 변한 상가에 마련한 은신처에서 눈을 떴다. 은신처는 의류 상가 2층 구석에,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있어서 1층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었다. 조금 전, 아래층에서 미묘한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을 L은 놓치지 않았다.
“쨍그랑.”
확실히 누군가 있다. 1층에 설치해놓은 알람 겸 트랩을 누군가 밟았다. 낚싯줄과 빈 병들로 만든 조악한 구조물들을 눈에 띄지 않게 교묘히 숨겨놓으면, 적어도 자는 도중에 등을 찔리는 위험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L는 허리춤에서 사냥용 단검을 꺼냈다. 조용히 상대방을 제압하기에 나이프와 활만큼 효과적인 무기는 없었다. 익숙하게 사슴 사냥용 나이프를 거꾸로 쥐어 들고, 아마도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를 통해서 올라올 침입자를 확인하기 위해 의류용 마네킹들 사이에 숨어서 조용히 숨을 죽였다. 상가로 돌아들어올 수 있는 계단은 가구와 망가진 카트 따위로 막아 놓았기 때문에 홀 가운데에 놓인 에스컬레이터 계단만이 이층으로 올라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베이징 6환(천안문 광장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둘러싼, 베이징의 구역을 구분 짓는 도로의 명칭. 이 도로들을 경계로 베이징의 지역들을 나누어 부른다.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이 2환, 그 밖은 순차적으로 3,4,5,6,7 환이 있다. 보통 3환까지를 베이징 시내로 여긴다.) 외각에 위치한 조용한 상가. 근처에 대형 마트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애매한 크기의 상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다. 생존자들은 주로 대형 마트를 중심으로 군락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누군가 왔다는 것은 뭔가 분명한 목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그 목표가 식료품에 대한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그다지 사용할 곳이 없는 귀금속류나 사치품을 수집해서 외부로 팔고 있는 수색 집단, 혹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을 찾고 있는 사냥꾼 집단, 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식료품을 찾기 위해 어떤 위험이 숨어있는지 모를 폐허를 탐색할 만큼 사람들은 더 이상 어수룩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순박한 인간이 살아남아 있을 만큼 이곳은 녹록하지 않다.
전염병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까지 번졌을 때 중국 공산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베이징 3환을 따라서 담을 쌓는 것이었다. 3환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공산당과 연줄이 닿지 않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람이 있는 곳은 언제나 차별이 발생한다. 그리고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그 차별은 더욱 도드라졌다.
L은 그의 빌어먹을 아버지를 떠올렸다. 숲 한가운데에 던져져서 생존하는 방법을 강제로 익혔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나뭇가지로 덫을 놓고,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볕이 들지 않는 곳에 땅을 파고 식량을 저장하는 방법 등을 떠올렸다. 그 시절 배웠던 것 중 L이 가장 잘했던 것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숨을 죽이고 납작하게 엎드려서 상대방이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않는 것. 자신이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이끼라고 여기며 계속해서 기다리는 것이 L이 가진 가장 큰 생존의 덕목이었다.
그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전염병으로 인한 폭동이 일어났을 때도, 이후 대대적인 군의 개입과 병의 창궐로 사람들이 죽어갔을 때에도, 그리고 전염병 사태 이전 그가 몸담았던 조직에서 상대 조직의 조직원들을 암살했던 때에도, 그는 항상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L은 사람들이 가장 무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항상 혼자 지내며,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이 L의 생존 방식이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1층에서 소리를 낸 침입자가 눈치를 채고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사람이 아닌 무엇인가가 트랩을 건드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L은 함부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움직이는 것은 완벽하게 어둠이 깔리고 그 어둠이 눈에 익었을 때, 상대방이 어떠한 장비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한층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주변이 어두워졌을 때, L은 미리 창문에 설치 해놓았던 로프를 1층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 줄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침입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조용히 그들이 지나가는 것이 최선임을 잘 알고 있기에, 상가 건물 입구 곳곳에 설치해 놓은 빈 병으로 만든 경보 장치들을 확인하고 다시 은신처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상가 건물 입구에서부터 찬찬히 자신의 트랩들을 확인하며 움직였다. 먼 거리에서 떨어져 있는 유리병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설치해 놓은 장치에 가까이 가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덫을 덫 삼아서 사냥꾼을 잡는 동물들도 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은 것은 그가 13세가 되던 겨울이었다. 눈 덮인 숲속에서의 사냥은 특히 쉽지 않았다. L 스스로도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시기였고, 그것은 사냥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굴 밖으로 나와 움직이는 작은 동물들이 주 사냥감이었다. 아직 덜 얼어붙은 물줄기가 흐르는 계곡으로 향하는 길목이 L이 덫을 설치하는 주된 장소였다.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도랑물을 찾아 내려오는 동물들을 잡기 위해서였는데, 이러한 생각은 어린 L만이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덫에 걸린 토끼를 수거하기 위해 자신이 덫을 설치해놓은 장소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L은 문득 자신이 포식자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재빠르게 근처의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확인했다. 바람이 등 뒤에서 계곡 방향으로 불고 있음을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자신의 냄새를 맡은 늑대가 등 뒤를 잡고 있을 때였다. 그 늑대 또한 참을성 있게 미끼를 수거하러 온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가 왼편에 있던 복도에 설치해놓은 유리병이 떨어져 깨져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트랩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식료품 가게였던 폐허의 안쪽에서 뭔가가 슬쩍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방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의 경보 장치에 걸렸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기다리고 있었다.
L은 과거 자신이 늑대를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은색으로 빛나는 털을 가진 그 늑대는 언덕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L은 자신이 눈을 돌리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 늠름한 생물도 아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서 이곳에 나온 것일 테니. 저 늑대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독립적인 녀석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아무리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늑대 무리를 상대하는 것은 몸에 기름을 바르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녀석도 그런 L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L의 눈을 바라봤다. 분명 목숨이 오가는 긴박한 상황이었을 텐데도 L은 그 순간이 이상하게 평온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저 늑대가 울부짖어 주변에 다른 늑대들이 모인다면, 혹은 저 늑대가 척후병이고 뒤에 다른 늑대들이 몰려온다면. 냉정하게 생각할수록 L에게는 이 상황이 너무도 불리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늑대는 조용히 작은 소년을 내려다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L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확인할 것인가. 아니면 조용히 돌아갈 것인가. 만약 저것이 인간이고 선발대라면 지금 여기서 제거하는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기에, 차라리 또 다른 은신처를 찾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제발 쏘지 마세요.”
어둠 속에서 양손을 든 사람이 어렴풋이 보였다. 목소리는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억양이 특이했다. L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방의 모습이 명확하게 시야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화살을 활시위에 얹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무 무기도 없어요. 제발 쏘지 마세요.”
어둠이 눈에 익자 남루한 차림의 여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자그마한 다른 그림자가 붙어있는 것도 눈치챘다.
“쏘지 마세요.”
어색한 성조의 중국 표준어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어디에서 온 외국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경계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다른 일행은?”
L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위치를 특정할 수 없게 어둠 속에서 자리를 옮겼다.
“다른 일행은 없어요.”
“여기에 온 이유는?”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고 있었어요.”
“돌아가.”
“…”
“그리고 이곳에는 다시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침입자를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은 아니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기에, 그리고 왠지 저들은 돌려보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L은 그 일행들을 보내주려고 마음먹었다. 여인의 옆에 숨어있는 아이 때문이기도 했다. 이 도시의 짐승들은 아이와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 실제로 어린아이를 본 것도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린 갈 곳이 없어요.”
여인은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곳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옆에는 10-12세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터번을 뒤집어쓴 채 한 손으로는 여인의 옷가지를 붙잡고 있었다.
“…”
L은 잠시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딱 저 아이만 했었는데.
아이와 엄마라니. 약탈자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어떠한 집단에 속해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최소한 그 그룹은 여성과 아이를 보호해 줄 만큼의 인간성은 유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왜 그 그룹에서 이탈한 것일까.
L은 문득 자신이 마주했던 늑대를 떠올렸다. 그 늑대는 처연하게 그를 바라봤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만 한참 동안 자신을 바라보던 그 늑대는 조용히 몸을 돌려 눈으로 뒤덮인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원래 우리는 북유럽에 있었어요. 그러다가 옐로우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아, 그쪽 사람들은 전염병 사태를 그렇게 불렀어요. 그때부터 아시아인들에 대한 테러가 심해졌지요. 전염병 사태가 가라앉은 이후, 저희가 신세를 지던 분이 자신의 지인이 있는 중국으로 가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었어요. 중국은 거의 폐허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3환 안쪽은 치안도 식료품도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좋은 편이었죠. 이전까지 축척해놓은 부로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할 시기였어요. 하지만 베이징 시민권이 있지 않은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저희를 보호해 주던 사람들이 쓰러지고 난 뒤, 더 이상 벽 안에 있을 수 없게 되었어요.”
L은 K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K는 불안한 듯 O의 손을 꽉 잡았다. O는 K를 빤히 바라봤다.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우선 안전한 장소로 자리를 옮긴 L은 북유럽에서 왔다는 K와 O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L은 O가 자신의 딸과 겹쳐 보이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L은 보관하고 있던 육포를 가져와 그들에게 건넸다. K는 O가 의심을 거두고 음식을 먹는 것을 바라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K와 O는 원래 북한 상류층이었다고 했다. 본명이 김미현이었던 K는 예전부터 중국에서 여러 사업을 하셨던 그녀의 부모님 덕분에 어느 정도 중국어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말을 할 수 없었던 딸 O, 오하나는 그녀가 살았던 어떤 장소에서도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는 듯했다. K가 중국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함께 있었던 일행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O는 몸을 부들거리며 이를 깨물었다.
K는 O를 감싸 안아 달랬고, L 또한 그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굳이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 L은 모닥불을 피우고 잠시 자신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는 어렸을 적 마주했던 늑대를 다시금 떠올렸다. 아마도 그 늑대는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자신의 마지막을 보낼 장소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L은 모닥불을 뒤적거리며 생각했다.
<챕터 3>
지지부진한 나날들이 이어져갔다.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A였지만, 점점 말라가는 그의 모습에서 그의 초조함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항생제 내성에 관련된 문제는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전염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는지, 전염성이 높다는 말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항생제 내성 박테리아처럼 병원에서 발생된 것도 아니었다.
발원지로 추정되는 곳이 축산 농가이기는 했지만, 가축에게 항생제를 남용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축산 농가가 진짜 발원지가 아닐 확률이 훨씬 높다고 A는 생각했다. 남한 정부에서 돼지 농장을 발원지로 특정했지만, 그 시골 마을의 생존자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인터넷 기사만이 그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공식 자료였다. 심지어 한국의 상위 보건 기구에서도, 뚜렷한 전염병의 발생지와 파생 경로에 대한 명확한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치로. 집에 가서 눈 좀 붙이고 와. 밥은 챙겨 먹고 있나?”
그렇지 않아도 초췌해 보이는 아시아인 연구원들 사이에서도 A는 유독 눈에 띄었다. 항상 잘 다려진 셔츠와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취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시커먼 연기 같은 것이 항상 그의 어깨 위를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발 집에 가서 좀 쉬라고. 자네 옆에 있으면 나까지 숨이 막혀.”
J는 휴일 아침까지 배양 샘플들을 확인하고 있는 A의 등을 떠밀었다. J는 A를 실험실 문밖으로 밀어내더니 그렇지 않아도 긴 양팔을 꼬고 서서 입구를 막았다.
“괜찮다니까.”
“자네 말고 자네 옆에 앉아있는 친구들이 박테리아보다 먼저 죽을 거 같아. 일본에서는 그렇게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게 미덕일지 몰라도 여긴 아니라고. 휴일에는 쉬어. 주변 사람 괴롭히지 말고. 가서 제대로 된 음식도 좀 먹고. 사료(fodder) 말고 음식(food) 말이야.”
J에게 떠밀려 오랜만에 연구실을 나온 A는 잠시 넋을 잃었다가 이내 주차장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숲으로 둘러싸인 연구센터 밖으로 나오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운전대를 잡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숙소까지 가는 길은 한적한 산길이었다. 단조롭고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서 운전을 하다 보니, A는 곧 샘플에 대한 생각에 다시 사로잡혔다.
뭘 놓치고 있는 걸까. 아직 확인해보지 않은 항생물질이 몇 종 남아있었고, 감염 경로를 파악했기에 확산은 더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아직 발생 원인과 발생지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이니까, A가 초조할 이유는 그다지 없었다.
문득 A는 숙소의 빈 냉장고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뭔가 먹을 수 있는 것을 사야겠지.
박테리아는 어디에서나 서식한다. 박테리아가 슈퍼 박테리아로 변하는 이유는, 항생제 때문에 사멸하는 과정에서 항생물질의 정보를 간직한 박테리아의 사체가 다른 박테리아에게 그 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 생존 본능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들만의 정보 체계를 만든다. 그렇게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번식한다. 생각해보면 박테리아도 인간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 팍! -
갑자기 날아온 돌멩이가 운전석 옆 유리창을 때렸다. A는 순간 당황했지만, 여러 번 겪어봤던 일이기에 브레이크를 밟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속도를 내려던 차였다.
- 퍽! -
아까보다 더 큰 돌이 날아와 차의 옆 유리창을 때렸다. A는 금이 간 유리창을 보고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개의치 않고 속력을 내어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백미러를 통해 반짝거리는 무엇인가가 날아오는 것을 얼핏 보았지만, 아마도 차까지 닿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작은 상점들이 즐비해있는 거리에 들어섰지만, A는 섣부르게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아시아인 출입 금지-
A는 전염병 사태가 벌어지기 이전에 줄곧 들러 끼니를 때우곤 했던 식당 앞에서 잠시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붙어있는 푯말을 보고는 다시 액셀을 밟았다. 가게 주인과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의 친분은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아시아인들의 입장 자체를 거부하는 가게들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인종차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감시 인력이 항시 상주하는 대형 마트가 아닌 작은 상점들은, 아시아인 혼자 장을 보기 위해서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운전 도중에 쓰레기나 돌멩이를 맞는 것은 차라리 괜찮았다. 대낮에 도로 한복판에서 테러를 당했다거나 실종되었다는 기사들은 거의 매주 갱신되고 있었기에, 이제는 웬만한 시비 정도의 차별은 이슈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시아인들이 운영했던 상점들은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했던 초기에 이미 약탈당하고 불타버렸다. 각종 매스컴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한 감염자 현황과 사망자 현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하고 있었지만, 보도된 사망자 중 상당수가 감염과 상관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인종 테러로 인한 아시안 사망자의 증가는 감염에 의한 사망으로 교묘하게 뒤바뀌고 있었다. 당연히 그래프는 아시아인의 치사율이 높은 것처럼 나타났고, 이 잘못된 통계의 피해는 다시 아시아인에게 돌아갔다.
선탠을 좀 더 진하게 해야 하나. 타이어를 터트리지 않은 게 어디야.
라디오를 틀어봤지만, 그렇게 기분전환이 되지는 못했다. 대형 마트에 도착해서도, A는 한참 동안 핸들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머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생필품 목록을 생각하며 마트에 사람이 없기를 빌었다.
다행히 무인 마트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힐끗힐끗 쳐다보는 아이와 그 아이의 손을 잡은 백인 여성이, 가능한 A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듯이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을 뿐이다. A는 최대한 보존 기간이 길면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레토르트와 인스턴트였다. 시리얼과 같이 먹기 위한 우유와 치즈를 담고 계란을 집을까 말까 고민하던 차였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테러를 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몸이 경직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가능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A는 급히 무인 계산대로 향했다.
그때도 그랬다. 아무도 없는 마트에서 카트를 계산대 앞에 두고 잠시 다른 무엇을 찾아서 왔었던 것 같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가장 위에 올려두었던 계란들이 무엇인가에 짓눌려 깨져 있었다. 공공의 장소에서 느껴지는 경멸, 혹은 불편한 시선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여 오는 압박감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번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공포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A는 가능한 빠르게 계산을 하고 숙소를 향했다.
숙소에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고 구매해온 식료품들을 정리하려 했다. 언제 먹다 말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음식물이었던 것들을 버리고 급하게 사온 것들을 꺼내고 있을 때였다. 저지방 우유가 아닌 일반 우유를 집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길. 유당 증후군 때문에 일반 우유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데. 그때 갑자기 뭔가 A의 머릿속에서 번뜩 떠올랐다.
혹시 내가 잘못 접근하고 있었나. 박테리아 자체에 병을 유발하는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가 빠져 있기 때문에 병이 유발되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인간들은 유지방에 대한 분해 효소가 부족하다. 송아지에게 최적화되어있는 우유가 인간에게 완벽하게 소화되려면 앞으로도 수천, 어쩌면 수만 년의 지난한 진화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소장에서 충분히 분해, 흡수되지 못한 유당들은 대장으로 이동되어 세균성 분해가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포도당과 유산이 되며, 이로 인해서 대장이 자극되어 설사, 가스로 인한 복통 등이 유발된다.
결국 소장의 유지방 소화효소가 부족하기 때문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옐로우’에 인간의 면역체계를 잠식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면역체계에 잡히지 않을 만큼의 위험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닐까? 혹은 위험성이 없는 것처럼 면역 세포들을 속이고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A는 급히 연구소로 차를 몰았다. 만약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박테리아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지 않는 특이점을 찾는 것이 해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를 들뜨게 했다. 새벽 3시. 경비원들만이 남아있는 연구소에서 A는 박테리아가 언제부터 독성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역 추적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옐로우 박테리아들은 대장에 서식하는 일반 무독성의 박테리아와 거의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샘플로 수집한 10여 종의 이 수퍼 박테리아들은 이미 변형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이다. 이미 수십 번은 확인한, 3D 모델링으로 그려낸 옐로우의 DNA 구조들을 나열했을 때 A는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박테리아의 DNA에서 어떠한 유전정보가 일률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자연적으로 가능한가? 더 나아가 우연히 발생한 돌연변이 박테리아가 아시아 전체로 퍼질 만큼 생존 및 번식을 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A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옐로우’의 염기서열과 비교 군에 있던 박테리아 사이의 대조군이 눈앞의 모니터에서 확인되기 시작했다. 있어야 할 염기서열이 텅 빈 공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A는 한참 동안 화면 안의 모델링 된 염기 구조를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옐로우’는 새로 생겨난 박테리아가 아니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장내 박테리아였고, 어떤 이유에서인가 특정 염기서열이 제거되면 체세포를 공격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불특정 다수의 몸 안에 있는 박테리아의 유전 정보를 수정할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 만약에 이 ‘돌연변이’가 우연하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설계된 것이라면. 누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A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발견이 어떠한 파장을 초래하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 돌연변이 때문에 세계는 폐허가 되었다. 사람이 사라진 도쿄의 거리. 눈앞에 끝없이 쌓여있던 시체를 담은 포대들. 끊임없이 시신들을 태우고 있었던 소각장.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던 회색 재들이 A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 지옥을 만든 것은 결국 인간이었다.
A는 머리를 감싸 안으며 울부짖었다.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 믿을 수 없는 기괴한 울음소리가 텅 빈 연구실에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챕터 4 >
A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보겠다고 막대기에 실을 매달아 휘젓고 있는, 어린 자신의 모습이었다. 차가운 물의 감촉, 그를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던 어머니의 표정, 개울에서 헤엄치던 커다란 물고기들. 그렇게 많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다녔지만, 당연하게도 미끼조차 달지 않은 그의 막대기에 걸려들 물고기는 없었다. 가끔 꿈속에서 그 풍경을 다시 겪을 때에도, 그는 미끼를 걸지 않은 막대기로 물속을 휘젓곤 했다.
A는 1980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조각가였고, 할아버지 역시 유명 화가였다. 철이 들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A는 자신도 미술작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엇인가를 재현해서 그리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마당에 핀 꽃과 나무, 가족들의 초상, 집안을 가득 채운 공예품들 등, A는 그 모든 것들을 너무 쉽게 그려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온 가족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가문을 이을 재목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A는 언제부턴가 미술이 지겨워지고 있었다. 중학 졸업반이 될 무렵, 미술시간은 물론 방과 후의 미술부 활동 모든 게 지겹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고서라도 이루고 싶은 꿈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니는 중학교에서 도차 미술 교사의 편애로 A는 종종 교무실로 불려가곤 했는데, 그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래희망을 적은 설문 중, 미술 관련 진로에 대한 안내문을 정리하는 일을 A에게 부탁했다. 마침 다음 시간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체육시간이기도 했고, 미술에 대한 관심이 있는 학급생이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했기에 A는 미술 교사의 서류 정리를 돕고 있었다.
“에이치로. 너희 교실 아라이에게 이것 좀 전해줄래?”
선생님은 A에게 종이봉투를 건넸다.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미술 관련 진로 안내문이라는 것쯤은 A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우리 교실에 미술 지망생이 자기 말고 또 있었다니. 약간 설레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A는 봉투를 받아들고 교실로 향했다.
아라이. 대개 이 성을 쓰는 것은 재일한국인들이었다. 같은 교실의 클래스 메이트였지만 교실에 이런 성을 가진 아이가 있다는 것 자체가 A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항상 교실 구석에, 마치 없는 것처럼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A 역시 그런 아이가 같은 반에 있다는 사실조차 거의 느끼지 못하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재일한국인들과 엮여서 좋을 일은 별로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외면했던 것 같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그런 것들을 떠나서라도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 아무런 기회도 없었다.
아직 체육시간이 다 끝나지 않았나 보다. 도착했을 때 교실은 텅 비어 있었는데, A는 이를 예상하고 교무실에서 교실 열쇠를 빌려왔다. 자물쇠를 열고 교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졌다. 복도에서 들렸던 소음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디선가 들려오던 영어 교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텅 비어있는 교실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했다. A는 잠시 이 정적이 어색했지만, 망설이지 않고 교실의 맨 뒤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원래 이런 구석자리는 대장 역할을 하는 누군가의 전용 자리가 아닐까? 아라이가 그렇게 존재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교실에 나쁜 아이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대개 심한 이지메가 있을 법도 한데, 다행스럽게도 이 교실에서 눈에 띄는 괴롭힘은 없었다. 그저 외면할 뿐이다. 아라이가 출석을 하지 않아도, 책상에 엎드려 있어도, 점심을 먹지 않아도, 그녀를 의식하는 사람은 그 교실에서 아무도 없었다.
A는 아라이의 책상 앞에 우두커니 서서 종이봉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게 나을까. 다른 아이들이 먼저 교실에 온다면 눈에 띄지 않을까. 교실에 없었던 사람은 나 정도일 테니, 아이들이 괜히 이상한 상상을 하지는 않을까. A 자신도 자기가 없는 사이 책상 위에 뭔가 놓여있다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책상 서랍에 넣어두려고 막고 있는 의자를 꺼냈다. 종이봉투를 서랍에 집어넣었는데 안쪽에서 뭔가가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순간 당황했지만 A는 차분히 떨어진 종이를 집어서 서랍에 집어넣으려 했다.
그 종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파란색 종이인 줄 알았는데, 파란 물결을 수채화로 그린 그림이었다. 푸른 물결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구성이었기에 순간적으로는 색면추상화처럼 보였다. 하지만 물결에 비친 햇살을 아름다운 곡선으로 표현했기에, A는 이 그림이 단순한 파란색 면 이미지가 아닌, 상당한 테크닉으로 공들여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A는 그림을 집어 들고 한참 동안을 바라봤다. 자신의 먼 기억 속, 개울가에서 손을 휘저었던 그때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했다. 어린 시절 따스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었다.
- 드르륵 -
갑자기 교실 문이 열렸다. A는 순간 소리가 나는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앞머리가 지나치게 자라서 눈을 가리고 있는 한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A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채고는 성큼성큼 A를 향해 다가왔다.
“아니. 난 그저 이 그림이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A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어느새 아라이는 A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내놔. 내 그림.”
생각보다 낮고 탁한 목소리였다. 하루 종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을 때 나올 것 같은, 쉰 목소리였다. A의 앞에 선 그녀는 생각보다 키도 컸다. 아라이는 A의 눈과 거의 같은 높이에서 시선을 마주치며 손을 내밀었다.
덮여있던 앞 머리카락 사이에서 그녀의 안구가 날카롭게 빛났다. 아라이는 A가 그림을 내밀자마자 낚아채고는 분하다는 듯이 씩씩거렸다.
“오해야. 나는 단지 미술 선생님이 뭘 전해달라고 하셔서...”
A는 변명을 하려 했지만 그녀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A는 더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뒤통수에 아라이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아라이가 A에게 사과를 한 것은 일주일도 더 지난 어느 날이었다. 방과 후, 미술실로 향하던 A를 그 아이가 불러 세웠다.
“그때는 당황했어. 바로 미안하다고 했었어야 했는데.”
그녀는 여전히 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서랍에 진로 상담 서류가 있는 걸 보고 바로 알아채긴 했는데, 사과할 타이밍을 놓쳤어.”
그녀는 A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치마를 입고 있지 않았다면 남자로 오해할만한 목소리와 말투였다. 일본의 평범한 여중생이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A는 그런 그녀의 말투가 싫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당당하게 사과를 하는 사람이 있다니. A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상하게도 순식간에 마음이 풀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신도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손 내밀 용기를 내기 어려웠는데, 먼저 다가와 준 그녀가 고마웠다.
“그때는 어디에 있다 온 거야? 체육시간이었잖아.”
“아니 뭐. 내가 체육을 하면 다른 여자애들이 불편해해서.”
너무 덩치가 커서 그런 걸까. 여자아이들의 관계 지형도는 너무 복잡하니까.
“그림 잘 그리던데. 나도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
A의 말을 들은 아라이는 왼쪽 입 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미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A는 무시하기로 했다.
“우리 교실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니.”
비꼬는 느낌이었기에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뭐라고 말을 이어야할지 약간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부럽다. 나도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약간은 쓸쓸하게 말하는 아라이를 바라봤다. 그렇다고 그녀가 주눅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타입이구나. A는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후 둘은 자주 어울렸다. 방과 후 미술시간 이외에도, A는 일부러 그녀에게 말을 걸곤 했다.
아라이가 책상에 엎드려있는 시간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주변에도 다른 아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약간 어색해 보였지만 그녀도 곧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왜 체육시간에 사라지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떤 운동을 해도 아라이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A는 그녀가 미술보다도 운동 쪽에 더 소질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미술부원 자체가 얼마 되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A는 이상하게 그녀와 이야기 하는 게 좋았다. 다른 여자아이들과 달리, 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그녀의 화법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함께 그림 전시를 보러가기도 하고, 미술 재료를 사러 돌아다니기도 했다. 사복을 입은 아라이는 영락없이 남자아이처럼 보였는데, 날씨가 더워지자 머리를 짧게 깎아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조금은 꾸며도 좋을 텐데. 하지만 A가 입 밖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미술실은 학교 옥상으로 나가는 문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둘은 종종 옥상에 올라가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날도 과자와 음료 같은 것들을 사서 옥상에 앉아있었다. 그날따라 날이 맑았다.
“고등학교는 정했어?”
아라이는 A에게 물었다. 아마도 A는 예대 진학으로 유명한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될 테지. 자신은 가정 형편상 집에서 가까운 공립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기에, 항상 멀리 출장을 떠나는 아버지 대신 남동생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라도 집에서 가까운 곳에 진학해야만 했다.
“아니. 아직.”
A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것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의 기대와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리고 지금은 그녀 때문에 미술부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구나.”
왠지 쓸쓸해 보이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아라이는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말없이 앉아있던 그녀가 일어났다. A 역시 일어서며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아라이가 갑자기 A의 앞으로 다가왔다. A는 순간 긴장해 숨이 멎었다.
“작년에는 나랑 비슷했는데. 남자들은 금방금방 자라네.”
그녀는 못마땅한 듯 A을 살짝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그녀의 정수리가 내려다보인다. 일 년 사이에 키가 좀 큰 건가. 희미하게 비누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내 동생은 벌써 아저씨 같아. 예전엔 귀여웠는데.”
아라이는 아쉽다는 듯이 말하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A는 잠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녀가 가려고 하는 학교에 자신도 진학하려 한다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A는 아라이가 약간은 기뻐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A가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아라이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라인으로 연락을 해도, 그녀에게서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A가 아라이를 다시 만난 것은, 그녀의 장례식에서였다. 중학 마지막 겨울방학에, 그녀는 원인 모를 질병에 감염되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 걸려있는, 아라이의 사진을 보고 나서야 A는 비로소 그녀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건장한 체격의 다부진 사내였다. 아라이가 아버지를 닮았구나. A는 그제서야 감정이 북받쳐 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장례식장에서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집에 돌아와 정신을 차려보니, A의 손에는 아라이 아버지가 전해준 자그마한 액자가 들려있었다. 그것은 푸른색 물결을 그린 그림이었다. 푸른 물결 위에 하얀 빛의 너울을 그려 넣은, 그 그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먼 지역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굳이 멀리 있는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며 혼자 동네 병원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동네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들이 듣지 않아 거동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을 때가 돼서야 그녀의 남동생은 아버지께 연락을 했다고 한다. 뒤늦게 집에 돌아온 그의 아버지가 펄펄 열에 끓는 그녀를 안고 동네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어떤 병원에서도 해열제 이외의 처방을 해주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녀를 큰 병원에 간신히 입원시켰을 때에는, 이미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죽음 때문에 자책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래서 제대로 된 외료 보장을 받을 수 있었고 아라이도 그럴 수 있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그녀를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보내지 않았을 텐데... 웅얼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A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A는 그날 이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 모두가, A가 포기하려 하는 보장된 그의 미래를 아까워했지만, A는 이 숨 막히는 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A는 아라이를 죽게 내버려 둔 이 나라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
<챕터 5>
L이 은거지로 삼고 있던 의류상가 지역은 중심지인 대형 마트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부분의 소규모 군락들은 주로 식료품을 얻기 용이한 대형 마트 안이나 그 근처에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 집단들 사이에는 영역이 경계 지어져 있어서 서로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았지만, 여러 이유 때문에 이렇게 경계를 넘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된다. 아마도 각각의 군락마다 구성원과 리더에 따라서 성격이나 성향이 달랐기에, 그 안에서의 비 적응자가 다른 그룹으로 이동하거나 독자적으로 이탈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L은 불과 얼마 전에 목격했던 그룹 간의 갈등 상황을 떠올렸다. 대개 식료품과 의료물품들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곤 했는데, 그날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중국계 그룹과 몽골계 그룹 사이의 갈등은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최근 들어 몽골계 그룹들은 지나치게 호전적으로 굴었다.
“가지고 있는 거 다 내려놓고 꺼져!”
L은 어설픈 발음의 고함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 고함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소리가 나는 지점으로 몸을 낮추고 이동했다. 소리가 나는 곳 근처의 건물에 들어가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위층으로 조심스럽게 기어 올라갔다.
“다 같이 힘든 처지에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중국인 그룹으로 보이는 3명의 무리가 적어도 대여섯 명 이상으로 보이는 몽골인 그룹에 둘러싸여 있었다. 몽골인들은 상대적으로 체격이 크고 머리 또한 짧게 깎고 있어서 금방 눈에 띄었다. 그에 반해 중국계로 보이는 그룹의 남자들은 삐쩍 말라있었고, 심지어 두 명은 안경을 쓰고 있었기에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가지고 있는 건 이것뿐이니 제발 그냥 보내주게.”
대표로 보이는 안경을 쓴 남자가 애처롭게 말하며 백팩에서 통조림 몇 개를 꺼냈다. 그리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방 내려놓고 뒤로 물러서.”
리더로 보이는 몽골인이 못이 박힌 몽둥이를 짚고 일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좋지 않군.’
L은 인상이 구겨졌다. 도와줘야 하나를 잠시 고민했지만, 잘못했다가는 자신도 위험해질 것 같았기 때문에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백팩을 내려놓은 중국인들은 서서히 뒤로 물러서고 있었고, 몽골인들은 조금씩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몽둥이를 들고 있던 몽골인 리더가 손짓을 하자, 역시 마찬가지로 터프해 보이는 덩치 하나가 백팩을 줍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L은 본능적으로 등에서 활을 꺼내어 활시위에 화살을 끼웠다. 덩치가 백팩을 주웠을 때, 중국인 셋은 멀찌감치 떨어지고 있었다. 백팩을 살피던 몽골인이 무엇인가를 꺼내어 그들의 리더를 향해 흔들어 보였다. 뭔가 괜찮은 물건을 찾았는지 웃으며 뭐라고 외치던 순간이었다.
“탕!”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L은 몸을 숙였다. 방금 전까지 전리품을 흔들던 덩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아까까지 뒤로 물러서던 중국인들이 재빠르게 튀어나와 백팩을 낚아채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시 멈칫했던 몽골인들이 그 뒤를 쫓아갔다. 몇 번의 총성과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번갈아가며 울려 퍼졌다. 해가 진 뒤, L은 조심스럽게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총성이 났던 반대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그룹 간의 다툼에 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이따금 총소리가 멀리서 들리곤 했는데, 요 몇 주 사이에 상당히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대부분 권총 등의 소형 화기였기에 그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총기를 제공하고 있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호전적이고 응집력이 강한 몽골계 아시아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한 중국계나 다른 국적의 집단들이 자신들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기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기에,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은 분명했다.
생존자들 그룹 중에서 몽골계 아시아인들이 주축으로 있는 경우가 가장 위협적이었다. 수는 적었지만 사회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생존 기술들이 가장 많이 체화되어 있었고, 응집력도 강했다. 중국계 그룹은 구성원 수가 다른 그룹의 몇 배는 많았기에 독자적인 행동이 가능했다. 가장 애매한 그룹은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중국에 머물고 있던, 타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었다. 간혹 아시아인 이외의 인종도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은 근처 아시아 국가들에서 사업차 머물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도시 인프라가 무너진 곳에서의 생존이 현지인보다 더욱 가혹하리라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L은 회상을 멈췄다. 그리고는 연기가 나지 않도록 바짝 말린 나뭇잎들을 모닥불에 밀어 넣으며 물었다. K의 서툰 중국어로 말했다.
“지인이 다산쯔에서 갤러리를 했었어요. 핀란드에 머물렀을 때 만났던 사람인데, 그 사람의 창고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들었어요. 누군가 그곳을 관리하고 있을 거예요.”
K는 모닥불 앞에 앉아 O를 바라봤다. O도 불안한 표정으로 K를 마주 봤다. 아마도 L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겠지.
L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술품에 관련된 사람들이라. 그런 사람들은 본 적이 없지만, 확실히 의심스러운 장소들은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 외곽에 있는 구호센터. 들어간 사람들은 있지만 나온 사람들은 없는, 게다가 임시 구호 시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감시가 삼엄한 장소가 곳곳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K가 말하는 창고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기에, 가느다랗더라도 어떠한 연결고리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L은 자신이 구호센터 근처에서 봤던 광경을 곱씹어 보았다. 지금 생각해도 석연찮은 풍경이었다. 하얀색 텐트들이 다닥다닥 늘어서 있었고, 감시탑과 바리케이드가 촘촘하게 서 있었다. 입구로 보이는 곳에는 총을 든 경비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전부 방독면을 쓰고 있어서 식별이 불가능했다.
L이 속해 있었던 그룹의 리더는 그 구호센터를 눈독 들이고 있었다. 식료품이야 어떻게든 조달 가능했지만 의약품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항생제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종류의 의약품이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L이 속해있었던 그룹의 리더는 시야가 넓었던 L에게 이 구호센터의 염탐을 맡겼었다. L은 여러 날 동안 구호센터 주변에 머물면서 그곳을 관찰했었다. L은 그때 느꼈던 가장 기이한 풍경을 떠올렸다.
정기적으로 구호센터에서는 화물차와 화물차를 호위하는 차량들이 드나들었는데, 그날은 특이하게도 헬리콥터가 날아왔다. 흰 텐트들이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중앙 건물들을 둘러싸고 있었고, 컨테이너 박스들 앞 공간에는 정체 모를 상자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 옆쪽에 위치한 착륙장에 헬리콥터가 착륙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높은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푸른색 십자가가 그려진 헬리콥터에서 말쑥한 사내가 안내를 받으며 내려왔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고, 맨 얼굴로 숨을 쉬고 있었다. L은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그 남자의 얼굴을 꽤 뚜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미남형에 기품 있는 태도가 몸에 밴 듯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에스코트 받는 것에 굉장히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얀 보호복과 방독면을 뒤집어쓴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안내되고 있었는데, 특히 L이 이상하게 생각한 부분은 그 남자가 동양인이었다는 점이었다. 잘 관리되어 매끈한 피부와 잘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카락, 혼자서만 무균실에 있는 것처럼 방독면 없이 숨을 쉬고 있는 것 차제가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를 둘러싼 흰색 방호복들 사이에서, 값비싸 보이는 진회색 양복이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다.
“혹시 당신도 저희와 같이 가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K의 물음에 L은 고개를 들었다. 왜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날 생각이 없겠는가. 단지 그것이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굳이 설명해야 할까.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가느다란 희망을 가지고 목숨을 거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L은 이 모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구하지 못했던 자신의 가족을 대신해서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는 착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단지 이 희망 없는 삶에서 작은 목표를 찾기 위한 것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L이 입을 열었다.
“쉽지 않겠지만, 우선 내가 말하는 규칙들을 지켜주시오. 우린 밤에만 이동할 거요.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위험의 낌새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내가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하면, 죽은 듯이 숨어있어야 하오. 출발은 1시간 뒤, 사람이 가장 피곤할 시간에, 그리고 우리가 가능한 체력이 많이 남아있을 때요. 식량과 무기를 제외한 짐이 되는 물건은 전부 두고 가야 하오. 그리고 ...”
L은 자신이 충동적으로 움직이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삶을 이어나가는 것에 그 스스로도 지친 듯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죽을 장소를 찾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얘, 하나야.”
L은 O를 바라봤다.
“혹시라도 엄마와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하렴.”
L은 O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O는 동그랗게 눈을 뜬 채 L을 바라보았다. L은 주머니에서 접이식 나이프를 꺼냈다. 날을 펴서 상한 곳을 살펴본 뒤, 다시 접어 O에게 건넸다.
“앞으로 네 몸은 너 스스로가 챙기는 거란다.”
O는 잠시 망설이다가 K를 바라봤고, 고개를 끄덕이는 K를 바라보고는 칼을 집었다.
“아으아..”
O는 L에게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L는 O가 최선을 다해서 감사의 표현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L은 잠시 자신의 유년 시절을 떠올렸다. 그의 부친은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이었을까. 사냥꾼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지만, 부친이 가르쳐준 다양한 트랩들에는 분명히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 있었다. 세상이 무법천지가 된 지금에서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것들을 어디에 사용했던 것일까.
그의 부친은 L이 16세가 되던 해에 홀연히 사라졌다. L이 산속에서 벗어나 도시로 흘러들어가게 된 것은 그가 20세가 되던 해였다.
“자 이제 움직입시다.”
L은 조용히 일어서며 말했다. 그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모래로 모닥불을 덮었다.
<챕터 6>
남한의 한 시골마을. 여름 더위에 황소도 힘을 쓰지 못하는 그런 날씨였다. 마을 한가운데에 어르신들이 정자에 모여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마을 이장인 황인성과 건넛집 박숙자는 대낮부터 막걸리를 마시며 이미 다 알고 있는 서로의 근황을 되묻고 또 되물었다.
황 이장은 유학 간 외동딸 이야기를 쉬지 않고 계속했다. 변변치 못한 시골에서 서울로 대학을 가더니 국비 장학생으로 유학 갔다고, 그날도 귀가 아프도록 자랑을 하고 있었다.
“아 글씨. 지예, 그 기특한 것이 거기서 선물도 보내고 말이여. 필요 없다는데도 뭘 자꾸 보내싸. 이번에 뭐 그거 뭐시냐, 무슨 꿀을 또 보냈어. 여기도 꿀 넘쳐나는고만. 코쟁이들 먹는 꿀은 또 다른 게비.”
황 이장의 자랑에 같이 앉아있던 박 씨는 핀잔을 놓았다.
“아유. 무슨 유학이 대수라고. 우리 을남이도 유학 갔소. 서울로. 생활비가 징합디다. 학비는 또 어떻고. 한 학기에 오백이요 오백. 소가 두 마리여.”
“아이고 박 씨. 서울보다 구라파가 싸다니께. 지예네 핀란드 학교는 학비가 80만 원이었나. 거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뭐 어디도 그렇고. 거기가 더 싸다 카더만. 허허허.”
“지예가 아주 효녀여 효녀. 을남이 생활비보다 싸네. 부럽소잉. 다 컸네, 다 컸어.”
“고것이 앙큼했지. 어렸을 때부터. 해준 것도 없는 디, 제 어미가 일찍 가서 그런 가. 속이 깊어.”
한참 자식 자랑을 하던 황 이장이 갑자기 말을 잃는다. 그 짧은 적막이 어색한 박 씨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시오. 보니께 뭔 일이 있고만.”
잠시 말을 멈췄던 황 이장이 입을 뗐다. 황 이장도 내심 박 씨의 조언을 구하려고 눈치를 보던 참이었다.
“엊그제 지예와 통화를 했는데 글쎄, 결혼한다고 하지 뭔가.”
박 씨는 눈을 번쩍 뜨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경사구만! 축하하오. 황 씨. 아이고 난 또 뭔 일이 있나 했는데, 경사가 있었네!”
황 이장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허허허. 고맙구먼. 그렇긴 헌데 그게 말이지… 다음 주에 남편 될 사람과 온다는 디, 아무래도 남자가 코쟁이인 거 같어…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하고 자꾸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는 걸 보니께...”
박 씨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이고. 고년. 지 애비 속을 아는 건지.
내색은 하지 않지만 딸과 함께 살았으면 하는 황 이장의 속마음을 박 씨는 잘 알고 있었다. 지예가 어렸을 때부터 옥이야 금이야 키우던 황 이장의 모습이 잠시 떠올랐다.
“요즘 시상에 국제결혼이 어때서 그런디야. 혼기 딱 맞춰서 가는 것도 복이여. 복.”
황 이장은 흘끔 박 씨의 눈치를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것지?”
황 이장은 잠시 말을 쉬며 막걸리를 마셨다. 박 씨도 막걸리를 홀짝거리며 먼 산을 바라봤다. 황 이장은 마음을 먹은 듯 사발에 있던 술을 비우며 말했다.
“그런데 이봐. 박 씨. 솔직히 말혀서 뭘 준비해야 될랑 가를 모르것다네. 해봤어야 말이지.”
아이고 이 순박한 양반.
“아요 그런 말 마소. 나가 도와 줄탱게. 우선 다음 주에 애들이 온다고 하니 옷도 좀 해 입고, 먹을 것도 좀 준비해놓고.”
그 후 일주일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박 씨를 따라서 시내 옷 가게도 가보고, 떡도 주문하고 고기도 잡고. 평소 알뜰살뜰하게 모아두었던 비상금도 꺼내어 동네 사람들과 마을회관에서 조촐하게 칼국수라도 대접할 요량으로 기분을 내고 있었다. 사위 될 사람에게도 자신의 딸이 남부럽지 않게 사랑받으며 커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지예는 똑똑 허니께. 분명 현명한 선택을 했을 것이지.
황 이장의 집은 마을 회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벌써부터 잔치 분위기다. 오랜만에 입는 정장을 입고는 집 앞 마당에서 우왕좌왕하던 황 이장은 마을회관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황 이장이 어떤 심정인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노래방 기계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난리여. 이걸 사위가 보면 뭐라고 하겄어. 채신머리없다고 그러는 거 아닌가 모르겄네.
황 이장은 타는 속에 괜히 TV 옆에 앉아있던, 마을 한쪽 편에서 돼지 농장하는 김 씨에게 애먼 타박을 줬다.
“텔레비나 좀 틀어봐. 동경서 하는 올림픽이나 좀 틀어봐. 마라톤 할 터 인디. 좀 점잖게 앉아서 티비나 보자니께.”
마을 사람들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했지만, 노래방 반주 소리와 사람들의 노랫소리에 묻혔다.
“근데 온다는 아덜이 좀 늦네요잉.”
김 씨는 황 이장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우선 집에 들어가 가계시오. 아덜이 언제 올 줄 알고 마을 사람들이 숨죽이고 있겄소.”
황 이장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마루에 서서 우왕좌왕하다가 TV를 틀었다. 뭔 사고가 났나. 불안한 황 이장의 마음은 덜덜 떨고 있는 그의 오른쪽 다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의미 없이 틀어놓은 TV에서는 마라톤 중계를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원래는 도쿄에서 진행해야 하는 마라톤이 무더위로 인해서 삿포로로 장소가 변경되었다는 아나운서의 설명이 나왔다. 한국 대표로 출전한 선수 세 명 중 한 명이 30km 지점에서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마치고 하위그룹으로 쳐진다는 자막이 나오고 있었다. 역할을 다한 페이스메이커 선수의 모습이 비쳐졌다. 서서히 속력을 줄이던 그 깡마른 선수처럼, 검은색 작은 승용차 하나가 서서히 기어 오더니 황의장의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아이고 올 것이 왔구나.
황 이장은 커튼 너머로 활짝 열어놓은 대문을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떤 남자일까. 대문 앞에 멈춰 선 검정 승용차는 한참 동안 움직일 기미를 모이지 않았다. 이윽고 조수석에서 한 시커먼 남자가 내리는 것을 보고, 황 이장은 잠시 숨이 멈춰졌다.
딱 벌어진 어깨로 까만 정장을 입고 차에서 내린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 황 이장의 머릿속에서 한순간 든 생각은 방금 전까지 TV에서 봤던, 그때까지 선두를 달리고 있던 외국인 선수의 까만 얼굴이었다. 황 이장은 뒤따라 운전석에서 내린 익숙한 딸의 모습에 정신이 돌아왔다. 2년 전에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본 그리운 딸아이의 모습에, 황 이장의 마음이 다소 차분해졌다. 초인종 벨 소리가 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간 황 이장은, 활짝 웃으며 딸과 미래의 사위를 향해 미리 준비해놓았던 대사를 외쳤다.
“헬로! 나이스 투 미트 유. 웰컴 투 마이 홈!”
어색한 영어 발음에 헨리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그도 황 이장을 향해 말했다.
“안뇽하세요.”
황 이장은 왠지 모를 대견함을 느끼며 헨리에게 포옹을 했다. 그리고 기다려왔던 자신의 딸에게도 포옹을 했다.
“잘 지냈재?”
“아빠는, 잘 지내셨어요?”
지예는 뭉클함에 눈물이 나왔다. 그동안의 걱정이 다소 누그러짐과 동시에 한참 늙어버린 아버지의 모습에 대한 애잔함이 몰려왔다. 걱정했었는데. 이 남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반대하시면 어쩌나. 지금도 걱정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과 자신의 선택을 믿어주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목이 잠시 메었다.
딸과 사위에게 살가운 포옹을 마친 황 이장은 자신의 집에까지 노랫소리가 들리는 마을회관 대신, 자신의 딸과 평생을 살아온 집으로 손님을 안내했다. 거실 소파에 헨리와 딸은 앉혀놓고 꿀 차를 내왔다.
“그래서 어떻게 만난거여?”
지예는 헨리를 바라보고는 황 이장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하며 웃었다. 헨리도 덩달아 웃는 걸 보니, 아마 둘 다 자신들이 처음 만나게 되었던 날을 돌이켜보고 있나 보다 싶었다. 헨리는 지예에게 꽤 길게 이야기를 했고, 지예는 웃으며 황 이장에게 말했다.
“내가 무슨 아르바이트를 했었거든. 제약회사 같은 데서 신약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잠깐 알바 했었어. 헨리가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었고.”
헨리는 자기가 한말이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황 이장의 표정을 보니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뭐. 지예가 알아서 하겠지.
“그럼 의사인 겨?”
“아니 의사는 아니고, 경호원이야. 직업군인 출신.”
지예는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가 방금 한 말에 웃음이 다시 나왔다. 처음 자신을 봤을 때 마치 자신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살아온 것 같았다는, 연애 초기의 달달한 말들을 아버지께 전하는 것은 좀 아니다 싶었다.
황 이장은 딸과 헨리가 눈을 마주치며 웃는 것을 보고 내심 마음이 놓였다.
그래. 지예야. 니가 행복한 것이 제일 이제. 아비는 니가 좋다면 그냥 다 좋다.
“아이고 까맣네. 까메. 쟈는 속도 없이 어찌자고 저러 아를 데려온 것이여.”
마을 회관으로 황 이장의 가족들이 들어서자 숙덕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마을에서 이장 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똑 부러지는 행실이 지 애비와 똑 닮았었다. 이장의 딸이라서가 아니라, 동네의 싹싹한 귀염둥이로 자랐던 아이가 웬 흑인을 남편감이라고 데려왔으니, 마을 사람들은 그 새카만 사내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잘 지내셨어요? 제가 결혼할 사람이에요. 예쁘게 봐주세요.”
지예는 애써 불편한 시선들을 무시하고 방긋 웃으며 사람들에게 헨리를 소개했다. 황 이장도, 헨리도 그런 상황이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딸이자 미래의 아내가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고 둘 수만은 없었다. 두 남자들도 마을 사람들 사이에 앉아서 손짓 발짓을 하며 그 무리 안에 속하려고 애썼다.
한참 동안을 주거니 받거니 오고 가던 술잔에 황 이장은 어느덧 기분이 달큼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곡조 뽑고 마이크를 잡았다.
“마을 여러분. 지예가 벌써 시집을 가오. 애미 없이 스스로 큰 우리 아가 이제 벌써 시집갈 나이가 되었소. 마을 사람들이 같이 아끼고 보살펴 주셔서 오늘 이 자리가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부디 우리 딸아이와 그 남편 될 사람을 축복 해주시요잉.”
황 이장과 지예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헨리도 자리에 일어서서 마을 사람들에게 큰 절을 올린다.
그래. 다 똑같은 사람이지. 나부터가 예쁘게 봐야 사람들도 곱게 봐주지 않겠나.
황 이장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으며 딸아이를 바라봤다. 지예는 열이 오르는 듯 상기된 얼굴로 간간이 잦은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너무 큰일을 치르고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헨리가 걱정스러운 듯 자신의 딸의 어깨를 감싸는 것을 보고, 황 이장은 다시금 이 어린 연인의 축복을 빌었다.
마을 사람들은 밤이 깊도록 한참을 떠들고 마시다가 하나둘씩 집으로 흩어졌다. 설거지와 회관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아이들을 찾았다. 딸의 얼굴이 아까보다도 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입국하기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어서 약을 먹었다고 했다. 사윗감을 소개하는 것이 어지간히 부담이 됐었나 보다. 아무래도 그렇겠다 싶었다.
“아니 날도 이렇게 더운데 무슨 마른 기침이여. 내일 여그 보건소라도 가보는 게 어떠냐. 거기 의사 선생이 좀 무뚝뚝해도 병 하나는 잘 고치는 거 같던디.”
황 이장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녜요. 괜찮아요. 어차피 저희 내일 서울에 갔다가 모레 일본에 다녀오려 해요. 가는 김에 서울서 병원에 가보려고요.”
“아니 벌써 간다고? 오랜만에 와놓고는 이렇게 금방 가뿔게?”
황 이장은 못내 섭섭했다. 몇 년 만에 얼굴만 비출 요량인 딸이 못내 아쉬웠다.
딸과 헨리는 먼 한국까지 온 김에 일본에도 여행을 간다고 했다. 올림픽은 끝났어도 패럴림픽은 남았다나. 황 이장은 딸에게 듣기 전까지는 패럴림픽이라는 것이 올림픽 이후에 열린다는 것도 몰랐었다. 내심 섭섭했지만 자식 이길 부모 없다는 말을 되새기는 황 이장이었다.
“오늘 너무 감사해요. 아빠. 사랑해요.”
딸은 황 이장에게 긴 포옹을 했다.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황 이장도 딸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어색한 한국말로 감사하다고 말하는 헨리와도 포옹을 나누었다.
사랑방으로 헨리와 지예를 보내고, 황 이장은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긴 하루다. 갑자기 찾아온 적막감을 참지 못하고 황 이장은 또 TV를 켰다. 스포츠 하이라이트 뉴스가 낮의 치열했던 경기 장면을 중간중간 보여주고 있었다. 우승자로 보이는 사내가 환호를 받으며 시상대 위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구부정한 그의 허리가 황 이장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
지예는 괜찮을랑가. 모레 일본으로 간다는데, 얼굴이 저래갖고 여행은 무슨, 집에서 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겄네.
<챕터 7>
1985년.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의 실험생물학 연구소에 근무하던 오승호는 최근 자신의 연구 논문 때문에 한창 바쁜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세균 증식 억제에 관련된 논문으로, 기존 항생 물질 내성 대장균에 기생하는 바이러스 발견과 작동 방식의 메커니즘을 규명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었다. 작고 깡마른 체구 때문에 종종 청소년으로 오해받곤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번뜩이는 안광 때문에 그를 직접 만난 사람들은 대다수 주눅 들곤 했다.
그날도 오승호는 아침 일찍부터 실험실로 향했다. 건물에 발을 딛자마자 냉랭한 공기가 느껴졌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 선망하는 사람, 이용하려는 사람 등의 온갖 냄새가 그를 감싸왔다. 그날은 특히 뭔가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힐끗힐끗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까닥 고개 인사를 하며 자신의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오승호의 허리는 갑자기 곧게 펴졌다. 그리고 곧바로 정면에서 조선 노동당 휘장 달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군인을 향해 경례를 했다. 군인은 일어나며 말했다.
“쉬시오, 동무.”
오승호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당에 어떤 누가 될 행동거지를 했는지부터 생각해내려 애썼다. 그러한 오승호의 머릿속이 다 보인다는 듯이 그 군인은 말을 이어갔다.
“그리 뻣뻣하게 있을 필요 없소. 내래 조국을 위한 동무의 열정과 특출한 능력은 동무의 논문을 통해서 잘 보았소. 특히 위대한 우리 조국이 의약품 개발로 질병을 퇴치하고 의료 강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 인상 깊었소. 그 과정에 대한 큰 그림도 말이오.”
군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못 하고 얼어있는 오승호를 바라봤다.
“힘 빼라니까 그래. 문이나 좀 닫고.”
피식 웃는 군인의 얼굴에 오승호는 정신을 차렸다. 문을 닫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서려는 오승호에게 군인은 손을 내밀었다.
“강계 그루빠(그룹)에 들어오게 된 걸 환영하는 바요. 동무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크다오. 내래 리상철이오.”
리상철. 강계 생화학 연구소 소장. 북한에서 생화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연구자라기보다는 정치가로 언급되던 리상철은 북한 생화학 병기 분야의 일인자였다. 강계 연구소는 자강도에 위치해 있으며, 한국 전쟁 이후 일본군이 실험했던 병원균들과 탄저균 연구를 시작으로, 현재는 사린가스, VX가스 등의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연구소였다. 특히 강계 뜨락또르 종합공장(26호 공장)은 북한 무기 제조의 총본산으로, 방사포탄과 미사일 탄두 등이 이곳에서 중점적으로 개발되고 있었다.
‘무기 공장에서 왜 나를...’
갑작스러운 상관의 방문과 배치 명령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지만, 오승호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것이 궁금증 때문에 사라진 사람들을 통해서 배운 교훈이었다.
“위대하신 수령님의 지시 아래 새로 조성된 미생물 실험 분과에 함께 하게 되어 기쁘오, 동무. 동무의 열성적인 피와 땀이 우리 조국을 부강하게 만들 거라 믿어 보갔소.”
오승호는 잠시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지만, 곧 정신을 부여잡고 대답을 하기 위해 애썼다. 리상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오승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2021년. 바젤. 지난 한 달간 A는 ‘옐로우’가 인위적으로 조작된 박테리아라는 가정 하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일반 대장균과 큰 차이를 갖지 않는 대장균을 찾았고, 옐로우로 진화된 박테리아 내에서 특이 바이러스, 박테리오파지의 흔적을 확인했다.
박테리오파지는 균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를 의미한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미토콘드리아가 없기 때문에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다른 생물에 기생하게 되는데, 숙주로 삼는 대상에는 균도 포함되었다.
그동안 ‘옐로우’ 변이 대장균의 변이 유전자를 찾는 데에 집중했었다면, 인위적으로 지워진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던 중 이 바이러스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박테리오파지는 대장균의 특정 DNA를 뜯어낸 뒤 사멸하였기에 그동안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A는 이 바이러스, 박테리오파지가 평범한 대장균을 ‘옐로우’로 변이 시켰다는 가정 하에, 인위적인 박테리아 유전자 조작의 가능성에 대해서 E를 통해 백신 센터 센터장에게 보고했다. 자신의 가설이 어떠한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기에, A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보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E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A는 이 파장의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E 대신, 최종 책임자인 센터장과 독대해야 했다.
센터장 울리히 뵈네르트. 정치적 수완이 좋기로 유명한 남자였다. 올해 초에 유럽 백신 연구센터에 오자마자 적자 상태였던 센터의 재정상태를 플러스로 전환시켰던 사람이었다. 대부분 상용화되기 한참 전에 임상실험을 진행하기 때문에 항상 턱없이 부족한 정부 예산에 기대어 왔던 백신 센터가, 갑자기 등장한 U가 끌어온 민간 자본 덕분에 최신 장비들을 구비할 수 있었다.
노크를 하고 방안에 들어서자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소독약 냄새에 익숙한 A는 왠지 모를 거부감부터 들기 시작했다.
“어서 오게. 에이치로 수석 연구원. 거기 앉게.”
U는 A를 손님용 소파에 앉기를 권하고 검토하고 있던 서류를 정리했다. 차분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자네의 활약은 주목하고 있었네.”
서류 정리를 끝낸 센터장은 손깍지를 끼고 차가운 기운이 도는 푸른 눈으로 A를 바라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A에게 다가왔다. 건장한 체격의 전형적인 게르만인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호남형인 U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A에게 말했다.
“그래. 부탁한 일은 잘 되고 있나?”
A는 멍하게 U를 쳐다봤다.
부탁한 일? 그가 A를 세균 실험실에 배치시켰을 때부터 A에게 뭔가를 특별히 부탁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가 A에게 했던 말이라고는 격려의 말뿐이었다.
자네라면 꼭 문제점을 찾아낼 거라고 믿네.
그것이 격려였는지 아닌지 지금에 와서는 조금 헷갈리긴 했지만, 그것이 부탁의 말이라고 연결 짓기는 조금 어렵다고 생각했다.
A는 날마다 연구원들의 실적과 연구 성과에 대한 짧은 리포트를 보고하고 있었다. U가 부임한 이후, 연구원들의 특이점을 보고서에 추가 작성하게 되었는데, 위험요소가 다분한 연구실의 특성상 그 정도의 관찰은 이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잘 이해를 못 했습니다만, 부탁이라 하심은 어떠한 것인지...?”
A는 되물었다. U는 몸을 등받이로 젖히면서 말했다.
“아니, 자네는 잘 하고 있다네. 기대 이상으로 말이야.”
U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A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네가 에드워드를 통해서 건의한 자료는 잘 검토해봤다네. 새로운 시각으로 백신의 원인을 바라본 점이 아주 신선했네. 역시 훌륭해.”
U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낮은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만약 이 박테리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공표할 수는 없다네. 이건 의학적 소견이 아니야. 정치,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민감한 문제라네.”
U는 A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A는 U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자네도 알다시피, 아시아는 지금 폭발 직전의 원자로와 같아. 핵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도 아직 여럿 있다네.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겠지만, 이 질병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일으킨 테러라고 한다면, 아시아 국가들이 가만히 있겠나?”
U의 말은 A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설령 U의 염려처럼 상황이 악화된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밝혀야 하는 게 학자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하지만 정말 전쟁이라도 나게 된다면, 그것은 진실의 정당한 대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센터장님. 이건 단순한 질병의 문제가 아닙니다. 백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그 원인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해야 하고, 그 원인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면 백신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도 지금까지의 연구와는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U는 곤란하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었다.
“자네의 역할은 치료방법을 찾는 걸세. 우리는 답을 찾는 사람들이지, 문제의 들춰내는 역할까지 맡고 있는 것은 아니라네. 그 너머는 우리의 관할이 아닐세.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U의 완고한 태도에 A는 석연찮음을 느꼈다. 지금의 단계에서 국가 간의 갈등을 고려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센터장이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구하라는 압박을 이 사람은 왜 굳이 지금 해야만 하는 것일까.
‘울리치 센터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A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이해관계로 얽혀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의 출발점을 흐리게 만들고자 한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센터장님. 혹시 다른 이유가 있으신 거라면...”
U는 갑자기 기침을 하며 A의 말을 끊었다.
“자네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네.”
U는 능숙하게 A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고.”
내가 동양인이기에 이 연구를 의도적으로 맡긴 것일까. 아무래도 외지인인데다가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일본인이기에 잡음이 나더라도 무마시키기 어렵지 않기에 나를 이 자리에 앉힌 것이 아닐까.
A가 진전 없는 대화를 끊고 일어서려 할 때, U는 A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건 자네니까 하는 말인데, 난 저번 달에 일어났던 세균 누출 사고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다네. 잊지 말게.”
은근한 협박에 A는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A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서 하던 연구를 계속하는 것뿐이었다.
센터장과의 면담 이후 A는 이유 없이 제자리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늘었고, 더불어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어로 중얼거리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생화학 랩 3팀의 스텝들은 A가 더 이상 이 프로젝트를 진행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J는 A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점심시간이었지만 A는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J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샌드위치와 커피를 책상에 올려놨다.
“점심시간에는 점심을 먹으라고.”
J는 수척해진 A를 바라봤다. A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책상 위의 샌드위치를 바라보고는 시선을 들어 J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뭔가 결심을 한 듯이 J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요한. 자네 혹시 말이야.”
하지만 A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잠시 망설인 끝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냐. 별일 아닐세.”
A는 다시 책상 위의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J는 A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에이치로. 뭔가 답답한 일이 있으면 이야기하게. 큰 도움은 못되겠지만 그래도 혹시 아나.”
A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J를 마주 보았다.
'내가 이 친구에게 괜한 짐을 지우는 것은 아닐까.'
A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공격성을 가진 변이 대장균들에서 공통적으로 사라진 유전정보. 사람의 체내에 있는 대장균의 유전정보를 박테리오파지가 변이 시켰고, 그로 인해 대장균은 인체를 공격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박테리오파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 A는 ‘옐로우’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J에게 털어놓았다.
J는 놀란 표정과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번갈아 지으며 A의 이야기를 들었다.
“믿을 수 없군...”
이야기를 듣고 있던 J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볼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A는 다소 넋이 나가있는 J를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는 자네만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에드워드도 울리히도, 이미 알고 있는데 조심스러워하고 있어...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아.”
J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혼자 마음고생이 심했겠군...”
A는 고개를 끄덕였다. J에게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제서야 J가 사온 커피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미지근하게 식어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J는 집에 돌아와서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그의 집에는 냉랭한 공기만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정적 속에서 구석에 놓여있던 전화기 벨이 울렸다. J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J는 내심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챕터 8>
세 명은 주로 어둠을 틈타서 이동했다. 해가 지고 다시 뜰 때까지, 그들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해가 뜰 새벽녘에는 근처의 건물 같은, 은폐가 가능한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쉴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은 L의 몫이었다. 건물 안은 안전한 것처럼 보였지만, 또 다른 인간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L이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시야는 충분히 확보될 수 있는지를 확인한 후, K와 O를 안으로 인도했다.
L이 주로 선호하는 건물은 2층 이내의 상가건물이었다. 2층에서 시야를 확보하고 내려다볼 수 있으며, 책상이나 마네킹 등이 많아서 은신하기에 편했다. 그리고 건물이 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이라면 큰 부상 없이 뛰어내려 도망칠 수 있는 높이라고 판단했다.
생각보다 침구류나 의류 등은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주로 식료품과 의료약품, 그리고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은 전염병 사태 직후 일어난 폭동과 진압 때 사람들의 1차 목표가 되었지만, 의류와 침구류 등은 포장된 상태 그대로 창고나 선반 안에 쌓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가끔 연료가 남아 가동이 가능한 비상 발전기가 있는 곳이나 한때 유행했던 태양광 발전을 이용한 발전기가 설치되어 있는 상가를 발견하면 온수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먼저 진을 치고 있는 그룹이 없을 경우의 이야기다.
일행이 움직인 지 4일째 되는 날, 그들은 목표로 했던 미술품 창고에 가까운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L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폐 자동차들이 꽉 막고 있던 도로와 시위 당시에 바리케이드로 사용되었던 엄폐물들이 도로를 중심으로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누군가 도로를 사용하기 위해 치운 것이다.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던 그룹들 역시 함께 치워졌을 것이다.
대낮에 건물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면, 도로로 간간이 지나가는 차량을 먼 발치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주로 청십자가 그려진 하얀색 트럭들이었는데, 예전에 관찰했던 구호센터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K가 말했던 미술품 창고가 청십자 구호센터 근처에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있다. 더불어 예전 L이 몸담았던 그룹도 이 근처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긴장감은 한층 배가 되었다.
해가 지고 일행은 다시 움직였다. 이제 곧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L은 언젠가 몇 번 들렀던 적이 있는 상가건물을 마지막 은신처로 삼기 위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내심 예전의 동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만약 그들이 살아있다면, 물론 마지막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었지만, 그래도 한때 동료였던 사람들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건물 이층까지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L은 K와 O를 부르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그 순간 L은 맞은편 마트 건물에서 작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소형 망원경을 꺼내 연기가 나는 곳을 확인했다. 세 명의 동양인 그룹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를 굽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그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예전 그룹에 함께 있었던 동료 왕쥔이었다. 반가운 마음이 일었지만 동시에 위화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거지? 스무 명이 넘었던 그룹이었는데, 꼴랑 셋이라니.
L은 조심스럽게 마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W와 그의 일행들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는 권총을 꺼내들었다. L은 내심 놀랐다. 총을 구하기가 이렇게 쉬웠었나?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만난 친구의 얼굴을 보고 나니 총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느껴졌다.
“이봐! 왕쥔! 살아있었군.”
L은 반가움에 외쳤다.
“아니 이게 누구야. 리웨이?"
W는 오랜만에 본 예전 동료를 반기며 얼싸안았다.
“이 친구, 살아있었군!”
L은 웃었다. 문득 어둠 속에 숨어있는 W의 동료가 몇 더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거 다 자네가 가르쳐 준거 아닌가. 덫은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매복은 가장 숨기 어려운 곳에 숨어라.”
L은 피식 웃었다. 내가 이렇게 엉성하게 가르쳤었나.
“누구랑 대치 중인 거야? 미끼를 자처하다니. 그러고 보니 장형은?”
W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떻게 된 거야?”
“자네가 그렇게 사라진 뒤에 그룹은 거의 와해됐어. 지금은 몇 남지 않았다네. 장형은 얼마 전에 몽골 놈들한테 당했어.”
그랬군. L은 말을 아꼈다.
“그렇다고 자네를 원망하는 건 아니야. 자네가 표를 죽이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는 진작 총알받이로 저 길바닥에 누워있었겠지.”
표. 통칭 P. 그는 예전 중국인 그룹의 리더였다. 그는 호전적이고 무모했다. 의약품을 확보하기 위해 수송차량을 습격하는 등 갈수록 제정신을 잃어갔었다. 그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으리라.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네.”
“자네를 탓할 생각은 없다네. 다만 그 이후 우리는 계속해서 흩어졌다네. 그리고 각개격파 당하고 있는 중이지.”
W는 씁쓸하게 웃었다.
“왕. 그건 그렇고 나도 일행이 있어. 혹시 괜찮다면 오늘 밤만 자네가 도와줄 수 있겠나. 우린 내일 아침이면 떠난다네.”
“뭐. 자네 부탁이라면 뭐든지.”
W는 으쓱이며 말했다. 하지만 L이 K와 O를 데리고 무리로 돌아오자 분위기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L은 W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먼 친척들인데, 구호센터 근처로 가고 있다네. 자네가 좀 도와줬으면 해.”
W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K와 O를 바라봤다.
“친척이라고? 자네한테?”
“그래. 내 친척이라네.”
W는 의심쩍다는 표정으로 L을 바라봤다.
“그런데 말이지. 생각해봤는데, 자네 다시 그룹에 들어와 줄 수 없겠나? 표가 사라진 지금, 우리에겐 자네 같은 리더가 필요해. 자네는 실력이 있으니 다른 형제들도 큰 불만은 없을 거야.”
L은 잠시 망설였다.
“말은 고맙지만 우선 나는 저들을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싶다네. 이 일은 그 이후에 이야기하면 안 되겠나?”
W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지만, 곧 입을 열었다.
“자네. 자네가 떠난 뒤에 어떻게 우리가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그리고 나름 유대가 있었던 우리 형제들이 왜 갈라지게 되었는지, 단순히 표와 자네가 사라져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화제를 돌리는 W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L은 대꾸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자네가 사라진 뒤 우리에게 스폰서가 생겼어. 그들은 우리에게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해 주지. 그런데 말이지. 그 사람들이 왜 우리에게 이러한 물품들을 지원해 주겠나?”
W는 손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W의 동료들은 L을 향해, 그리고 구석에 앉아있던 K와 O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K와 O는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감싸 안았다. L은 순간적으로 허리춤에 있던 칼을 뽑으려 했지만 W는 L을 잘 알고 있었다. 등 뒤로 감추고 있었던 권총을 L에게 겨누었다.
“왕! 무슨 짓이야?”
L은 W를 노려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W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그의 팔을 잡아 꺾는다고 하더라도 K와 O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움직이지 마.”
W는 L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L의 손이 닫는 범위라면 총을 겨누고 있다고 하더라도 안심할 수 없었다.
“상황이 조금 바뀌어서 말이지... 스폰서 친구들이 여성과 아이를 찾고 있어서 말이야.”
“뭐?”
“기억하나? 자네가 염탐했던 구호소. 진작 그 친구들과 접선했었어야 했어. 표를 죽일 게 아니라 말이야.”
W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구호센터가 우리의 스폰서라네. 엄밀히 말해서 구호센터를 운영하는 신죠 컴퍼니가 말일세. 푸른색 십자가는 전에 봤겠지? 그리고 얼마 전에 그쪽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연락이 왔어. 어린 여자아이와 함께 다니는 성인 여성을 찾는다고 하더군. 자네도 잘 알겠지만, 벽 밖에서 여자아이와 함께 다니는 여성이 살아서 돌아다닐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네만...”
L은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푸른 십자가 로고... 신죠 컴퍼니...’
이제야 모든 퍼즐이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것 같았다. 이 도시에 총을 뿌리며 저 둘을 찾고 있었던 것인가. 저 둘에게 뭐가 있기에? 하지만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눈앞의 총구를 벗어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왕. 저들은 아냐. 내 친척이라고.”
L은 애써 연기했다. 어떻게든 생각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봐. 리. 누굴 속이려고 그래. 자네가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던 거 기억나?”
숲속의 코끼리처럼 외로이 혼자 가라. L이 습관처럼 되뇌던 말다. 하지만 그 말 앞에는 숨겨진 문장이 있었다. ‘현명한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면.’ 아마 W가 그것까지 알지는 못했던 것 같았다.
그래. 말이 씨가 되었군.
L은 씁쓸하게 웃었다. W는 악한이 아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인물이다. 지금 L이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마 지금 이 녀석들 몇 놈을 쓰러뜨린다고 하더라도 O와 K는 죽거나 잡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큰형님! 몽골 놈들이 왔습니다!”
전방에서 망원경을 들고 있던 W의 동료 한 명이 외쳤다.
“이런. 그 자식들 지치지도 않는군.”
W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외쳤다.
“몇 놈이나? 무기는?”
망원경을 들고 있던 W의 동료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보이는 것만 대여섯은 됩니다! 모두 뭔가 들고 있어요!”
W는 넌지시 L을 올려봤다. 하필 지금 저놈들이 쳐들어올 줄이야. 얼마 전에도 식량 때문에 한바탕했던 거 같은데. 그 정도로는 모자랐나.
L 역시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무리로 몽골 그룹과 싸우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기막힌 우연이 아니라면, 이런 어수선한 타이밍을 노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저쪽에서 이쪽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이니까.
L은 문득 자신의 일행이 W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이미 미끼에 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럽게 걸렸군...”
L은 W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불부터 꺼. 여기 다들 모여 있다는 걸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지 않으면.”
W는 모닥불 앞에 있던 동료를 흘깃 바라봤다. 그는 황급히 모닥불 위에 모래를 덮으려 애썼다. 그 사이 W의 다른 동료가 K와 O를 다른 장소로 옮기기 위해 움직였다. L은 W에게 다가가 자신에게 겨눈 총을 손으로 살며시 치우며 말했다.
“여기서 우리끼리 싸우면 다 죽어. 물러나는 게 나을 거야.”
L은 W를 바라봤다. 어차피 W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매복해있는 W의 동료들로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서서히 뒤로 물러나는 것이 최선의 전술이었다. 적들의 목적이 식량이라면, 아까까지 굽고 있던 통구이를 내주는 선에서 마무리될 것이다. 그렇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W는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도 좀 도와줘야겠어.”
L은 W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K와 O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내 가족들은 놔줘.”
W는 L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족이든 친척이든.”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우선 살고 보자고.”
Ⓒ 고재욱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