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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9>

 

A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서 잠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달리는 리무진 안에서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과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그는 S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 연락해 본 적도 없는 S를 만나러 가고 있다니. A는 자신에게 일어난 지난 시간들을 찬찬히 정리해보려고 애썼다.

 

 

 

 

A가 센터장을 만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연구는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총책임자인 E는 A를 호출할 수밖에 없었다. 센터장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A가 고분고분하게 불합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E 역시 일이 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E는 A를 건물 밖 벤치로 조용히 불렀다. 먼저 나와 벤치에 앉은 A는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헝클어져 있는 머리도 빗지 않은 A를 보는 순간, 이 안쓰러운 영혼을 위해 커피라도 들고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벤치에 앉은 A는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E도 벤치 한구석에 앉으며 말했다.

 

“에이치로. 자네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건 자네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E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불편한 표정으로 A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건네며 A의 표정을 살폈다. A는 머그잔을 받으며 내뱉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역할도 잘 알고 있습니다.”

 

A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찡그린 미간에서 A의 감정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A가 E에게 이렇게 감정을 드러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E는 퀭한 눈의 이 남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A가 맞나 생각했다. 약간의 연민과 그보다 조금 덜한 인간미가 느껴졌기에, E의 마음이 조금 뭉그러졌다.

 

이 친구. 무리하고 있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동양인이어서 그다지 맘에 들어 하지는 않았지만, E는 왠지 A가 싫지 않다고 생각했다. E는 한때 자신이 정의롭다고 느꼈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브렉시트를 겪으며 자신도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었던 경험을 생각했다. 재수 없는 잉글랜드인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열정은 많이 닳아 사라져버렸다. 어느 사이엔가 조직에서 능글맞게 살아남는 방법이 몸에 배어버렸다.

E는 근래의 A를 볼 때마다 지난날 고뇌에 차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신은 적당히 타협했지만, A는 자신의 소신을 이어갔으면 하는 희미한 바람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힘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어서 유감이네.”

 

A는 갑작스러운 E의 말에 적잖게 놀랐다. E에게서 힘내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또 시시한 트집을 잡아 시비나 걸 줄 알았기에 반쯤은 의심하는 눈초리로 E를 바라봤다.

 

“알잖나. 내 자리가, 사이에 끼여서 눈치 보는 자리라 말일세.”

 

E는 A를 보여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A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잘난 척만 할 줄 아는, 콧대만 높은 백인 아저씨인줄 만 알고 있었는데. 어쩌면 E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E와 A는 홀짝거리며 커피를 마셨다. 별로 할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서로 커피만 마셨지만, A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뭐 그렇다는 말일세. 그럼 이제 가서 일해야지. 아참 머그컵은 주고 가게. 나름 아끼는 거라서 말이야.”

 

E는 A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A 역시 약간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연구실로 향했다. 그다지 맛있는 커피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자신이 커피 맛에 대해서 생각해본 지가 얼마 만이었는지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되었다. 상사의 의외의 모습에 웃음을 지으며 연구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센터장의 호출이었다. A는 다시금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센터장실의 분위기는 지난번과는 사뭇 달랐다. U는 창가에 선채로 그를 맞이했다. 지난번과는 달리 따뜻하게 맞이하는 U의 태도에 A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손님용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는 U의 말을 A는 그대로 따랐다. U는 A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자네 혹시 오승호 박사라고 들어봤나?”

 

뜬금없는 질문에 A는 머뭇거렸다.

 

“그럴 테지. 북한의 생화학자라네. 북한 자강도에 위치한 강계 미생물연구소 생화학 무기 실험 연구원이었지. 혹시 작년 이맘때쯤에 핀란드로 망명한 북한의 생화학자 기사를 본 적 없나? 언론 플레이로 곧 묻히기는 했지만, 꽤나 시끄러웠었지.”

 

기사로 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2019년 초, 러시아 북서부에서 일어났던 소형 핵미사일 폭발사고 기사는 기억날 걸세. 러시아 측에서는 극구 부인했지만, 당시에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했었지. 주변국들의 피해가 없었고 러시아의 공식적 부인이 겹쳐져 있었기에 그렇게 관심을 오래 끌지는 않았었지만.”

 

그 사건이라면 A도 기억났다. 2019년의 러시아 소형 핵실험장의 폭발 사고. 그만한 사고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쉽게 사라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인접 국가들에서 측정한 방사능 수치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였다. 뭔가 폭발은 있었던 것 같지만 정작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채 유야무야 지나갔었다.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외부로 새어나가면 안 되네.”

 

U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어갔다.

 

“그 루머는 사실이야. 핀란드 국경에서 멀지 않았던 러시아 북서부 지역에서 폭발이 있었지. 핵실험이 아니라 생화학 실험실이었다는 점만 달랐지, 보도는 대충 맞았어. 그리고 그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연구소의 생존자였던 오승호 박사가 핀란드로 망명을 신청했다네.”

 

A는 U가 하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핀란드에 있었던 생화학 센터에서 근무할 때였어. 어느 날 인터폴과 유로폴의 사람들이 갑자기 찾아왔었네. 오승호 박사를 데려왔었어. 그리고 그 친구가 연구하던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오승호 박사가 가지고 있던 생화학 무기들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치료제와 백신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었었지.”

 

U는 잠시 짧은 숨을 내쉬었고, A는 하나씩 퍼즐의 조각들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나 현실은 예상을 벗어나곤 했었다. U의 입에서 이어진 이야기에 A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비용을 지원한 게 신죠(新城) 컴퍼니라네. 자네도 잘 아는 일본계 제약회사야.”

 

신죠 컴퍼니. 푸른 십자가를 엠블럼으로 하는 제약회사. A는 1년 전, 함께 일본으로 향했던 S의 전용 비행기가 떠올랐다. S의 풀 네임은 신죠 마코토. 신죠 컴퍼니의 후계자였다. 잊고 있었던 그의 얼굴이 기억났다.

 

“자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 얼마 전에 박테리아가 위생 센터 탕비실에 있던 가공육류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적이 있지. 균 배양실에서 거기까지 세균이 이동했다는 것은 둘 중 하나야. 처음부터 그 육류에 박테리아가 숨어있었거나, 아니면 누군가 모종의 이유로 세균을 옮겼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나.”

 

U는 A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A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드러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U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센터의 식료품 반입 과정은 꽤 까다롭다네. 특히 균이나 바이러스에 관한 검사는 말일세.”

 

A는 U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그럼 내부의 누군가 고의로 식품에 세균에 감염시켰다는 말인가?

 

A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U는 계속해서 질문해댔다.

 

“그리고 그렇게 균에 감염된 식품들에 노출되었는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피해가 전혀 없었는지 이상하지 않았나? 감염되면 치사률이 90%가 넘는 박테리아인데, 어떻게 그 많은 백신 센터 사람들은 아무 이상이 없는지? 설마 운이 너무 좋아서 아무도 탕비실 소시지를 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치사률이 90%가 넘는 박테리아? 그게 옐로우였다고?

 

 A는 그날의 일들을 떠올렸다. 원래 타부서였던 그가 박테리아 담당 부서로 이동되게 되었던 유출 사건. 당시 A를 비롯한 백신 센터의 직원들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조용히 지나갔었다. 심지어 유출되었던 박테리아가 그토록 무서워하던 변이된 개체라는 사실도 이제서야 알았을 정도로 정보가 통제되었다. A를 비롯한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사소한 사고라고 여기고 있었다. 여름철 대장균이야말로 육류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거니까.

 

“자네들은 이미 치료제를 맞았어. 그리고 그때 맞았던 치료제가 현재 옐로우로 변이된 박테리아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항생제라네.”

 

A는 박테리아 유출 사고 직후 전 직원에게 의무적으로 주사되었던 항생물질을 떠올렸다. 당연히 당시에는 박테리아 유출로 인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다. O-157과 같은 치명적 대장균이 체내에서 번식하기 전에 막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옐로우’였을 줄이야...

 

A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지금까지 그가 연구하고 있었던 것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옐로우의 치료제가 이미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A의 얼굴에 분노가 드리워졌다.

 

“이 무슨... 그럼 저희가 하고 있는 일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왜 치료제가 있는데도 배포하지 않는 거죠?”

 

A는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인내심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네. 문제는 자네가 맞은 그 항생물질이, 이 변이 대장균에 작용하는 유일한 항생제라는 점일세. 곧 이 항생물질의 내성 박테리아가 나올 거야. 이 항생물질을 투여 받은 사람들 중에서 말이지. 사실 우리는 지금 시한폭탄을 안고 이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는 거라네. 우리가 필요한 건 완벽한 치료제야. 언제 효과가 사라질 줄 모르는 항생제가 아니라 옐로우가 내성이 생기기 전에 근본적으로 이 박테리아를 막을 수 있는 치료제 말일세.”

 

A는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U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 박테리아는 항생제에 금방 내성이 생긴다. 박테리아가 항생제 때문에 죽은 세균의 DNA에서 항생물질의 유전정보를 얻기만 하면, 곧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항생제 내성 세균이 만들어질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면역체계가 생기는 것은 인간이나 박테리아나 마찬가지지.”

 

U는 A의 표정을 살폈다. A는 불현듯 U가 이런 모든 상황을 연출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항생제 내성이 생긴 슈퍼 박테리아, 그것도 옐로우로 변이된 대장균이라면 손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슈퍼 박테리아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후의 항생제까지 투여받은 실험 대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럼 이 백신 센터 전체의 연구원들이 모르모트였다는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A는 이 사실을 외부로 진작 알리지 않은 자기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썩어있었을 줄이야. 처음 면담을 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자네도 알다시피 이 세균을 막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마지막 항생물질이 첫 번째고.”

 

A는 더 이상 U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U는 A의 질린 표정을 가볍게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두 번째는 자네가 의견을 낸 것처럼, 평범한 대장균을 ‘옐로우’로 변화시키는 바이러스를 막는 방법이 있겠지. 근본적으로 말일세.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거야.”

 

A는 자신의 가설이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 사실을 어느 선까지 알고 있는지, 어디까지 준비가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베이징 같은 아시아의 메가시티들은 거대한 실험장 역할을 하고 있다네. 이 세균에 감염되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옐로우에 대한 내성과 옐로우를 유발시키는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까지 생긴 샘플들을 찾고 있어. 샘플이 찾아지면 우리가, 아니 자네가 자네 손으로 사람들을 구할 백신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고 말일세. 자네. 옐로우. 아니, 이 질병이 아직까지 퍼지지 않고 있는 게 왜라고 생각하나? 우리가, 그리고 신죠 컴퍼니가 간신히 세계를 지키고 있는 걸세. 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다 구할 수는 없어. 중국을 비롯한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이 비극이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게 마지막 차단막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네. 지금의 항생물질은 최후의, 최후의 보루야.”

 

“이 이야기를 왜 공론화하지 않는 겁니까?”

 

“일시적으로만 효과가 있는 약이 여기 있다고 말하라고? 언제 내성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말인가? 그리고 바이러스와 박테리아가 아직도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공표하자는 건가? 지금 분노의 대상을 아시아 쪽으로 간신히 방향을 틀어서 막고 있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의 분노가 다 어디로 향할 거라고 생각하나. 자네 일본인이면 잘 알겠지만, 세계대전 당시의 제국들이 다른 국가들을 침범한 이유는 언제나 내부의 갈등을 외부의 요인을 통해서 해결 해왔음이 아닌가. 지금 이 질병이 누구에게나 발병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나마 유지되던 사회 시스템마저 혼란에 빠질 걸세.”

 

A는 더 이상 U의 궤변을 듣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자기 생존을 위한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외부로 알리리라 마음먹었다.

 

“자네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야. 그럼 남아있는 사람들끼리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지 않겠나.”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인 A를 향해 말하던 U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스위스제 시계가 3시 정각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네를 찾는 사람이 있어서라네. 사실 지난주에 자네가 이 바이러스의 인위적 조작에 대한 가능성을 말했을 때부터 신죠 컴퍼니에서 자네를 만나고 싶어 했다네. 자네가 모든 것을 알고 난 다음에 말일세.”

 

3시 정각.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센터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A가 미쳐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U는 문을 열고 들어온 검정 정장 차림의 남자들에게 눈짓하며 A를 향해 말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게.”

 

 

 

 

A는 바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U와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A가 외부로 옐로우에 대한 사실들을 발설하든 하지 않든, U는 그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A가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A의 행동반경은 U가 설계한 울타리 안이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벌써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차에 앉게 되지 않았나. 우선은 S를 만나야 한다. 이들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A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S를 만나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창밖 멀리 커다란 유리 건물이 보였다. 파란색 십자가와 그 밑에 적혀있는 VANITAS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계 글로벌 제약회사. 이상하리만큼 급격한 성장 과정이 의심스럽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근래에 많은 구호활동을 하며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특히 옐로우 사태 이후 아시아 곳곳에 적극적으로 구호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구호센터들이 전부 샘플 공장들이었다니. A는 먹구름이 끼고 있는 창밖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챕터 10>

 

유리창이 깨진 창밖에는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몽골인 그룹에게 몰려 서서히 뒤로 물러서다 보니, 결국에는 폐 상가 건물 안으로 몰리고 말았다. W는 애써 무리를 이끌고 도망치려 했지만, K와 O라는 인질과 손발이 맞지 않는 동료들을 한꺼번에 통솔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L은 자신이 가장 피하고자 했던 상황에 몰리고 있음을 느끼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 적들은 처음부터 이 시간대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를 몰아서 빈 건물 구석에 몰아넣고,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서 쳐들어오겠지. 시야는 눈에 들어오지만 상대방의 몸이 아직 무거울 때를 노리고 들어올 것이다. 이 상황에 맞춰서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L은 이 상황이, 자신이 주로 안전하게 사냥을 할 때 쓰던 방식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서서히 사냥감이 심리적, 육체적으로 지칠 때까지 몰아가다가, 한순간에 화력을 집중해서 상대방의 숨통을 쥔다. 물론 상대가 인간일 경우에도 이 방식은 유용하게 사용된다.

 

그런데 이런 걸 칭기즈칸들이 생각하고 움직였다고? 석연치 않았다. 예전까지만 해도 그쪽 그룹에 머리를 쓸 줄 아는 녀석은 없었던 것 같은데.

 

L의 기억 속에 있는 몽골인 그룹은 호전적이고 용감하지만, 영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항상 무모할 정도로 정면으로 쳐들어오곤 했었다. 새벽녘의 동틀 시간을 노린 습격은 왠지 그들 답지 않았다. 저 녀석들도 리더가 바뀌었나. 확실한 것은 저쪽에도 사냥에 익숙한 누군가가 있다는 점이었다.

 

L은 재빠르게 2층으로 올라가 망원경으로 마트 밖을 살폈다. 총 8-9명 정도로 보이는 덩치들이 그림자 속에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W의 그룹들은 왕을 포함해도 다섯 명으로, 각자 1층 마트의 기둥과 가판대를 엄폐물 삼아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산탄총 하나에 라이플 셋, 권총 넷, 다섯. 화력 차이가 너무 나는데...

 

W의 그룹도 총기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소형 총기로 라이플을 상대하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우선 사거리로 끌어들여 대치 상황을 만들고 후방에서 라이플을 교란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W 또한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W는 시선 확보가 용이한 구석에서 L을 바라보았다.

 

L이라면 배후로 돌아갈 것이다. 저 친구 특기니까.

 

L은 활이나 나이프 같은, 소리가 나지 않는 무기들을 잘 썼다. 평소 자신의 존재감을 잘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주변의 부락들이 그들을 습격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L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L이 표를 죽이고 무리에서 사라진 그날 이후, W는 어떻게든 그들의 공백을 메우려 애썼지만 주변의 적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W이 이끌던 중국계 그룹은 계속해서 입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불리해지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신죠와 손을 잡았던 것인데, 상황은 계속 나쁘게만 흘러갔다.

 

W의 예상대로 L은 활을 빼들고 상대방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적들이 눈앞의 우리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그들 뒤로 넘어가서 뒤를 잡을 것이다.

 

“나와! 안에 몰려있는 거 다 알고 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건물 내부에 울려 퍼졌다. 이마에 붉은 X 모양의 문신을 새긴 덩치가 외쳤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한눈에도 X 문신의 사내가 상대방의 무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활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L은 상대방이 조금 더 접근해오기를 숨죽이고 기다렸다. 그때였다.

 

“우리도 피 보는 것은 원하지 않아! 여자와 아이를 넘기면 아무 일도 없을 거다.”

 

뭐라고? L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곧 차분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도 정확하게 김미현과 오하나를 노리고 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신죠 컴퍼니가 의뢰를 한건 왕의 집단만이 아니었다.

 

“웃기지 마. 이들은 우리가 먼저 찾았다. 가서 신죠 놈들한테 그렇게 전해!”

 

W의 고함소리가 허망하게 울려 퍼졌다. 상대방의 비웃음 소리가 건물 안쪽으로 스며들어왔다.

 

“권총 몇 정으로 뭘 할 수 있겠나? 이 거리에서 맞출 수나 있겠어?”

 

“꺼져!”

 

W가 위협사격을 했지만, 상대방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W가 쏜 권총 소리는 허망하게 사라졌고, 상대방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 바라던 바였다. 치나(China) 자식들.”

 

곧이어 양측에서 총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서로 은폐물에 숨어서 상대방을 향해 조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쏴대는 수준이었지만, 개중에는 훈련받은 사람도 있었다. 라이플을 들고 있던 저격수에 의해서 W의 부하 둘이 괴성을 지르며 쓰러질 때였다. X 문신은 뭔가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봤다. 뒤에서 저격수 역할을 맡고 있는 세 명의 총소리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X는 어느 순간 라이플의 굉음이 전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비로소 무엇인가가 자신들의 뒤를 잡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런 얇실한 쥐새끼가!”

 

X는 허리춤에서 아마존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자신의 왼쪽에서 라이플을 들었던 저격수 방향으로 급히 뛰어갔으나, 그가 발견한 것은 뒷덜미에 화살이 꽂힌 채 꼬꾸라져 있는 동료의 시체였다. 적들 중 사냥에 능한 자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X는 곧바로 몸을 낮췄다.

 

샌님들만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암살에 능한 적이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점이 뼈아프게 다가왔지만, X는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먼저 활을 가지고 있는 적부터 잡아야 한다. 인질을 확인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L은 세 번째 저격수를 활로 제압한 뒤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가장 위험한 저격수들을 치웠으니 당분간은 대치 상황이 되리라고 예상했다.

L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L은 W가 있었던 마트의 안쪽으로 우회했다. 성급하지 않게, 가능하면 조용히 K와 O를 데리고 사라지고 싶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상황에서 서툰 솜씨로 권총을 쏘는 인간들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바로 코앞에서 쏴댄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인질로 잡혀있는 K와 O를 구하려면 아무래도 W의 동료를 치울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W는 바보가 아니었다. 라이플 소리가 사라진 뒤 한동안의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때, L이 이쪽 진영으로 돌아오고 있었음을 직감했다.

L이라면 분명히 이 대치 상황을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저 두 인질 쪽으로 오고 있겠지.

W도 몸을 낮추고 인질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L은 몸을 낮춘 상태에서 망원경을 빼들고 K와 O의 위치를 확인했다. 다행히 건물의 맨 구석에 있는 사무실에 모여 있는 듯했다. 사무실 앞에는 K와 O를 데리고 갔던 W의 동료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대치 상황이 계속되자 기다리지 못하고 사무실 문 앞에 고개를 내밀었다 숙였다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한눈에도 이러한 상황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하지. 치워야 하나. W의 동료를 죽인다는 것이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활을 당길 때였다.

 

갑자기 옆구리 위쪽에서 예리한 아픔이 느껴졌다. 서둘러서 몸을 비틀어 활로 자신을 향해 내리쳐지던 칼을 간신히 비켜 막았다. 이마에 붉은 문신을 새긴 덩치가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뒤를 잡고 있었다.

X는 손에 감촉이 있었던 L의 옆구리를 발로 참과 동시에 다시 칼을 고쳐 잡았다. 첫 한방에 끝냈어야 했는데, 갈비뼈에 걸려서 치명상을 주지 못했다는 점을 냉정히 파악한 X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행동을 실행했다.

인질들을 지키고 있던 W의 동료도 이 둘을 발견하고 총을 겨눴지만, X가 던진 칼이 그의 이마를 꿰뚫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L은 재빨리 나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한 치 망설임 없이 X의 목덜미를 찔렀다.

K와 O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L은 자신의 나이프가 상대방의 팔에 막혀 목에 닿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옆으로 굴러 이 불리한 상황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X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X는 빠져나가려는 L의 목을 낚아챘다. L은 완벽하게 목이 졸리기 직전, 자신의 목과 X의 팔뚝 사이로 자신의 왼팔을 끼워 넣었다.

 

“그만! 둘 다 멈춰!”

 

L을 뒤쫓아 온 W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총을 빼들었다. W는 엉켜있는 두 짐승을 향해 총을 겨누며 소리쳤지만 자신이 한발 늦었음을 깨달았다.

X는 한 손으로 부상을 입은 L의 목을 조름과 동시에 L의 몸을 방패 삼아서 W의 총구로부터 자신의 몸을 가렸다.

 

“꽤 하는데, 치나.”

 

X는 털털하게 웃으며 L에게 속삭였다. L은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목덜미를 감싼 X의 팔뚝이 숨을 조여 왔다.

X는 W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총 내려놓고 저 둘을 나한테 보내. 그렇지 않으면 이 재주 좋은 친구도 곧 죽어.”

 

W는 냉정해지려고 애썼다. 아마 상대방은 저 덩치를 포함해 두어 명, 이쪽은 전멸이다. 젠장. 내가 쳐놓은 덫에 내가 걸리다니.

 

“어이! 이리 와! 여기에 다 모여 있다!”

 

W가 생각할 틈도 없이 X가 동료들을 불렀다. 저놈들이 온다면 여기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진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어느 틈에 사무실 밖으로 기어 나온 O가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지르며 X에게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기습이었기에 X는 자신의 팔에 O의 칼이 꽂히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X가 곧바로 O를 밀쳐냈지만, L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던 팔꿈치가 느슨해진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L은 X의 허벅지에 칼을 꽂아 넣은 후 아이를 낚아채 W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X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바로 K를 향해 내달렸다.

W가 곧바로 총격을 가했지만 X는 K를 붙잡아 방패 삼았다. W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이 불리해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X의 나머지 동료들이 곧 들이닥칠 것임을 잘 알기에, L과 O를 향해 외칠 수밖에 없었다.

 

“도망쳐!”

 

L은 O를 한 손에 감싸 안고 W와 함께 뛰기 시작했다. 옆구리가 타는 듯했지만, 갈비뼈 덕분에 칼이 깊이 들어가지는 않은 듯했다.

K를 향해 O가 울부짖었다. 하지만 L은 돌아볼 수 없었다. 지금 망설인다면 전부 죽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등 뒤에서 K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를 부탁해요! 그 아이만큼은...!”

 

K는 계속해서 외쳤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곧 이어진 총격 소리에 묻혀버렸다. 도착한 X의 동료들은 L과 W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대고 있었다. L과 W는 자신들의 뒤를 쫓는 총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뛸 수밖에 없었다.

 

 

 

 

 

 

 

 

 

 

<챕터 11>

 

한참을 달리던 L과 W는 어느 순간 약속이나 한 듯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이 아이를 노리는 거야?”

 

L은 탈진해서 의식을 잃은 O를 내려놓고 물었다.

 

“그 아이인지는 몰라. 여성과 같이 다니는 아이라고만 했지, 그 사람들이라고는 안 했어.”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까 그 자식들 확실하게 노리고 왔었다고!”

 

W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놈들도 나처럼 생각했나 보지.”

 

W는 머리를 쥐어짜던 L에게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나도 몰라! 젠장. 우선 생각을 좀 해보자.”

 

이대로 K가 말했던 목적지에 간다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설명해 줄 K가 납치된 이상, 계획을 수정해야 할 수밖에 없다.

 

“왕. 우리는 미술품 수장고로 사용되는 창고로 가던 길이었어. 구호센터 근처에 있는. 자네 혹시 아는 것 없나? 그 근처에 있는, 뭐든 잡히는 것 없어?”

 

W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L은 O가 숨을 쉬는지 확인한 뒤 W를 바라봤다.

 

“뭐. 알긴 알지. 그런데 거기 자네가 말한 것처럼 멀쩡한 곳이 아냐.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물건들을 다른 나라로 빼돌리고 있어.”

 

L은 잠시 멈칫 거렸지만 곧바로 W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들도 의뢰를 받았었어. 도자기같이 돈 되는 것들을 가져오면 식량과 의료품, 무기로 바꿔준다고. 우리가 총이 어디서 났겠나?”

 

W는 숨을 돌리고는 말했다.

 

“백인 놈들은 우리를 직접 상대하지 않아. 중간에서 전달하는 놈들이 있지. 주로 영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들인데, 나도 몇 명 알아. 예전에 내가 구해준 친구 하나가 거기서 짐꾼 역할을 하고 있지.”

 

W는 그에게 신세를 졌던 친구가 도자기 등 밀수품들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주로 그 친구를 통해서 이런저런 정보들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신죠. 그 자식들, 우리한테만 일을 던지는 게 아니었어.”

 

W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이제라도 깨닫다니 다행이군. 그 몽골 자식들 라이플은 어디서 났겠나?”

 

L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 지금 신죠가 문제가 아냐. 그 친구들 좀 소개해 주게. 다른 선택지가 없어.”

 

W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운에 맡겨보자고.”

 

 

 

그날 저녁, 의식이 돌아온 O는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L은 O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아이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품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어 O에게 건넸지만, 아이는 웅크리고 있을 뿐 곁눈도 주지 않았다. W는 그런 L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L은 W를 힐끗 쳐다보고는 O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도 어렸을 때 부모님과 갑자기 떨어졌었단다.”

 

이 아이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L은 자신이 어렸을 때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가 없던 O가 L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긴장감이 누그러지고 있다는 공통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통증 때문에 L은 옆구리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천 덩어리를 떼어냈다. 그리고 긴장 때문에 잊고 있었던 상처를 살펴보았다. 가슴팍에 두르고 있었던 장비들이 칼날을 막아주지 못했더라면, 아마 이런 조악한 처치로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했다. 감염이라도 되었다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는 멎었지만 퍼렇게 변한 환부가 부어올라 있었다.

L은 어렸을 때 종종 했던 사슴 사냥을 떠올렸다. 화살에 맞은 사슴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따라간다. 하루 종일 사슴이 흘린 피를 따라가다 보면, 체념한 듯 주저앉아 있는 사냥감을 마주하게 된다. 아무리 상처를 입더라도 제자리에 주저앉으면 안 된다. 그걸로 끝이라는 것을 L은 잘 알고 있었다.

 

L의 상처를 바라보던 O는 품 안에서 자그마한 깡통을 꺼내었다. 스테인리스로 되어있는 작은 철 깡통이었는데, O가 통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의약품처럼 보이는 물건들을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L의 상처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마치 자신이 치료할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L은 미심쩍었지만, O에게 상처를 맡겨 보았다.

L이 O에게 나이를 물었다. O는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1을, 오른쪽 손가락을 활짝 폈다.

 

15살. 생각보다 나이가 많구나. 아무래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체구가 작은 것이라고 L은 미루어 짐작했다.

 

O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상처를 닦아내고 고약을 발랐다. 어디선가 천을 구해온 W가 O를 도와 L의 상처를 싸매었다.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작은 상처 때문에 균에 감염되어 죽어간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다. 항생제를 구하지 못하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W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굳이 L에게 말하지 않았다.

 

W는 곧 잠들었지만 L와 O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L은 O에게 자신이 어렸을 적 숲속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긴 이야기를 이어갔는데, L은 그것이 얼마 만에 사람과 나눈 긴 대화였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L은 말하고 O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짓을 하곤 했는데, 서로 소통이 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L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L은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그의 딸은 L이 일터에서 가끔씩 집으로 돌아올 때면 무서운 짐승을 피하듯이 숨어버리곤 했었다.

 

그러게 집에 자주 좀 들어와요. 애가 아빠 얼굴도 잊어버리겠어.

 

L의 아내는 자주 타박을 하곤 했다. 언젠가부터 집에 돌아갈 때 아이에게 줄 작은 선물을 하나씩 가지고 들어갔던 것이 생각났다. 딸아이가 무엇을 좋아할지 알 수 없어서, 다소 엉뚱한 선물들을 가지고 갔었다. 주로 작은 장난감들이었는데, 그것이 유일하게 그와 그의 딸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곤 했었다. 그의 아내는 자기 선물은 없냐고 핀잔을 주곤 했지만,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무뚝뚝한 남편이 가족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만으로도 감사해했다.

 

왜 그때 좀 더 자주 같이 있어주지 못했을까. 조금 더 노력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어느새 자신에게 기대어 잠든 O를 바라보며, L은 안도감과 미안함, 무력감 등이 뒤섞여 있는 감정을 곱씹고 있었다.

 

 

 

 

 

“전염병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베이징이 엄청나게 큰 미술 시장이었던 것은 알고 있지? 알아먹지 못할 그림과 조각품들 말고도 도자기, 화조도, 장신구 등 보물들이 엄청나게 유통되고 있었어. 그 보물들이 그 난리 통에 다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나?”

 

W는 찬찬히 걷고 있는 L에게 말했다.

 

“어딘가 잘 쌓여있지 않겠나.”

 

L은 예술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심드렁하게 말했다. W는 그런 L에게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갔다.

 

“잘 쌓여있지. 잘 쌓여있고말고.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그 잘 쌓여있는 보물들을 외국으로 빼돌리는 창고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 김미현이라는 여자가 어떻게 그곳을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들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도 그쪽에서 흘러나오는 일거리들 덕분이기도 하다네. 생각보다 그쪽 일이 많아.”

 

L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일거리가 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네.”

 

“3환의 벽 안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보물들이 들어가고 있어. 물론 해외로도 많이 빠져나가고 있지만. 아마 곧 이런 밀거래 방식이 아니라, 정식 절차를 받은 군인들이 싹 쓸어갈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 벌써 용병들로 구성된 정식 수색대들도 돌아다니고 있어.”

 

L은 지난번에 봤던 트럭들을 떠올렸다.

 

“문제는 그 수색꾼들 사이에서도 뒷돈을 받는 놈들이 있다는 거야. 우리 돈 받는 놈들이면 그나마 괜찮은데, 잘못 걸리면 절차도 없이 머리에 바람구멍이 생긴다고.”

 

“...”

 

“우선은 조심해야 해. 믿을만한 녀석이 아니면 믿지 않는 게 좋아.”

 

W에게 생존 수칙을 듣고 있다는 게 약간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지만, L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따금 O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살피며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멀리서도 한눈에 커다랗다고 느껴지는 창고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는, 얼기설기 갖다 댄 철판들로 이루어진 창고들이었는데 지키는 사람도, 들락거리는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 그들이 찾는 미술품 창고인지 아닌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생선 통조림 그림이 그려져 있는, 그저 엄청나게 거대한 녹슨 철제 창고들이 들어서 있는 것으로만 보였기에 L은 다소 의아해했다.

 

“여기 밖에서는 망한 생선 공장처럼 보이지만, 조심해야 돼. 여기저기에 CCTV들이 있으니. 우선 여기서 저 꼬마와 기다리고 있게. 친구가 있는지 확인해봐야겠어.”

 

L은 O와 함께 목적지로 보이는 창고 맞은편에 위치한 자그마한 건물 안에서 창고 건물 뒤쪽으로 돌아들어가는 W를 지켜봤다. O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L을 바라봤다. L은 그런 O의 손을 꽉 쥐었다.

 

다시금 단단하게 채비를 하고 있을 때, O가 그의 팔을 잡았다.

멀리서 W와 W의 동료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길 것을 대비해서, 사냥용 칼을 손 안쪽으로 감아서 숨기고는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W의 동료는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표정이었다. 인상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당장은 믿는 방법밖에 없었다.

 

“리. 이쪽은 챠이라고 하네. 이 친구가 도와줄 수 있다고 하네. 일주일에 한 번씩 차량으로 밀수품들을 운반하는데, 그 컨테이너에 몰래 태워줄 수 있다고 하는군. 그리고 운반비용은 현물로만 받는다고 하네.”

 

그렇겠지.

귀금속 따위야 이곳에서는 아무런 쓸데가 없지만 밖으로 물건을 빼돌릴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L은 품 안에 있었던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냈다.

세상이 무너지기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을 보석류들을, 아이러니하게도 전염병이 터지고 난 직후에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아마 유통기간이 넉넉한 통조림이 더 구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며 상당히 알갱이가 큰 보석 몇 개를 꺼내 보였다.

 

“가능하면 먹을 것도 좀 줬으면 좋겠네. 항생제도 있으면 부탁하네.”

 

W의 동료 C는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W를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귀빈으로 모시도록 하지. 돈만 지불한다면야.”

 

W는 고개를 끄덕이며 L에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부디 행운을 비네.“

 

L은 W가 이곳에 남는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같이 가는 건 어떻겠나?”

 

“난 여기가 좋아. 흩어진 동료들을 모아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지. 자네가 다음에 여기 오면 깜짝 놀랄 거야.”

 

W는 손을 흔들었다.

 

“이만 가라고. 오랜만에 봤는데도 지긋지긋하네.”

 

L도 웃으며 말했다.

 

“그래. 살아서 보자고.”

 

L은 W와 포옹을 나눴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쉬움이 더 짙게 남았다.

 

“그럼 이 친구들 좀 부탁하네. 챠이.”

 

 

 

 

 

 

 

 

 

 

<챕터 12>

 

 

A는 말쑥한 정장 차림의 안내원에게 이끌려 응접실로 향했다. 양옆에 연구실들로 보이는 공간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벽 전체가 강화유리로 만들어져 있어서, 복도를 걸으면서도 이곳의 직원들이 꽤나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리방 안의 직원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미션에 집중하고 있었다.

 

A가 안내원에게 한참 이끌려 도착한 곳은 불투명한 유리로 사방이 막혀있는 응접실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놓여있는 커다란 화분과 응접 테이블 위의 화병이 영 눈에 거슬렸다. 손님용 의자에 앉아 S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S는 수행원들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에이치로.”

 

낮고 울림 좋은 목소리. 그리고 이국에서의 일본어가 A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오랜만이야. 신죠.”

 

S는 1년 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단정했다. 머리카락 한 올 삐져나온 곳이 없었다. 잘 다듬어진 머리카락과 비싸 보이는 정장, 그리고 언제나 동요 없는 태도가 같은 인간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울리히에게 상황을 들었겠지. 사실 자네가 알기를 원하지는 않았었는데.”

 

하지만 S의 표정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왜 내게 이런 사실을 알려준 건가? 그냥 모른 척 놔둬도 됐지 않았겠나.”

 

S라면 이미 그럴듯한 대답을 준비해 놨겠지만, A는 그 형식적인 대답이라도 듣고 싶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네를 친구라고 생각한다네. 그리고 우린 ‘옐로우’에 대한 공통된 분노가 있지. 자네 역시 내 주변에 몇 남지 않은 일본인이기에, 그리고 자네라면 이해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네. 물론 자네가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 중에서 제일 우수했었기도 하고 말이야.”

 

제일 다루기 편해서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뜩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난 이 친구에게 빚이 있다. 그리고 신죠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다소 경황이 없겠지만, 지금 같이 봐야 할 것들이 있다네. 우린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S는 들어왔던 입구와는 다른 문으로 A를 안내했다. A는 얼떨결에 S를 따라나섰다.

응접실로 들어왔을 때 걸었던 복도와 마찬가지로, 벽이 온통 유리로 된 복도가 쭉 이어졌다. 사이사이에 양옆으로 나 있는 복도가 있는 걸로 보아서는 바둑판 모양으로 공간이 구성되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이전 복도와는 달리 방안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고가의 실험 장비들로 가득 찬 방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 시설을 구축하는 데에만 꽤나 많은 비용이 들었을 거라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독자적인 실험 파트를 늘리기 위해서 추가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한참 동안 증축 라인을 거친 이후, 이윽고 도착한 에어샤워기를 거쳐서 멸균 섹터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S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서 다양한 기관들과 협력하고 있어. 아직도 건재하게 존재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과 그들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는 베이징에 있는 BL4 연구센터, 울리히가 대표를 맡고 있는 유럽 백신 센터 등, 많은 곳들과 협력하고 있지.”

 

“베이징?”

 

A는 귀를 의심했다.

 

“그래. 베이징뿐만이 아니야. 서울과 도쿄에도 있다네. 그쪽 정보가 잘 통제되고 있어서 언론 노출이 된 적은 없지만, 그쪽 연구시설들은 아직도 제대로 일하고 있어. 아니, 전염병 이전보다 훨씬 활발해졌어.”

 

멸균 섹터 안쪽의 격리 구역이 보였다. 입구 바로 앞에 서자 벽에 붙어있는 사인 보드에 녹색 불이 들어왔다.

 

“자네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문을 열자 마찬가지로 유리 큐브들이 이어져 있었다. 단지 다른 점은, 아까와는 달리 이번 유리방들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있었다는 것이었다.

각각의 넓이가 다섯 평 정도로 보이는 방안에는 하얀색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한 명씩 들어가 있었다. 방안에는 책상과 TV, 책들이 어수선하게 놓여있었으며, 식사 또한 그곳에서 하는 것으로 보였다. 취침은 다른 곳에서 하는 듯, 침대나 샤워시설 등의 상하수도 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유리방 안의 사람들은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A가 보이지 않는 듯이 자신들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다들 혈색이 좋았고 살도 올라있었다. 남녀노소와 인종을 가리지 않고 머리는 짧게 깎여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 있는 방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원이 수용되어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한참을 걷던 S는 발걸음을 멈췄다. 발걸음을 멈춘 방은 다른 방들과 떨어져 있었고 두 배는 넓어 보였다. 한 쪽에는 마찬가지로 머리를 짧게 깎은 50대 중후반의 여성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만이 유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는 것인지 그 밖의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미동 없이 거울 밖의 우리를 직시하고 있었다.

S는 잠시 동안 그녀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승호 박사의 아내야.”

 

A는 놀란 마음에 S를 쳐다봤다. S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베이징 구호소 쪽에서 발견되었다네. 우리에게 협력하는 현지의 친구들이 찾아냈지. 오승호는 혼자 망명하지 않았어. 가족이 있었지. 오 박사는 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네.”

 

S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 박사가 그의 가족들과 망명한 사실조차도 우리는 얼마 전에 알았어. 울리히가 그들을 몰래 보호하고 있었지. 아마 그도 몰랐을 거야. 이 사람들이 왜 중요한지. 그러다가 사실을 알게 되고는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우리에게 신변을 보호했던 것 같아.”

 

A는 S의 이야기를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었지만, 그동안에 일어난 사건의 퍼즐들이 조금씩 맞춰지고 있었다.

 

“울리히가 털어놓더군. 오승호라는 생화학자와 그의 가족을 자기가 보호하고 있다고. 오승호 박사가 그 분야에서는 꽤나 전문가라서, 정부기관 몇몇과 협업을 하고 있다고 말이지.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전부터 우리는 울리히와 몇 개의 사업을 함께 하고 있었다네. 특히 의약품 개발을 주로 했었는데, 옐로우 사태가 터진 이후에 상황이 급변했다네.”

 

S는 갑자기 피곤하다는 듯이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 바이러스를 처음 발견했던 게 닥터 오였어. 울리히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꽤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야. 그저 망명했고 능력 있는, 그리고 자기가 다루기 쉬운 과학자로만 알고 있었던 거지. 우리에게 그 정보를 넘기더군. 닥터 오가 사라진 것도 그 무렵이야.”

 

S를 A를 바라봤다. A 역시 S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닥터 오를 주 표적으로 추적했었지, 그의 가족들은 우리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네. 저기 있는 김미현과 그녀의 딸이 함께 넘어온 가족이었는데, 울리히가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우리에게 그녀들의 신변 보호를 요청했어. 북한, 중국, 러시아. 특히 러시아 측에서 압박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네. 그들도 엘로우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별 신경 쓰지 않다가 뒤늦게 깨닫게 된 거지. 오승호가 만든 게 무엇이었는지.”

 

A는 침을 삼켰다. S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오승호 가족들의 신변을 울리히에게 양도받아서 우리 쪽 사람이 보호하고 있었다네. 핀란드에서 중국에 있던 연구소로 옮기던 중이었어. 베이징 3환 안에 있는 연구 센터였는데, 중국에서 찾은 샘플들은 주로 그쪽에서 관리하고 있지. 그리고 중국 측의 요청도 있었고 말이야. 오승호 박사의 가족을 데리고 있으면 오승호를 찾았을 때 협상이 가능했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 우리 측에서도 나쁠 건 없었어. 북한이나 러시아보다는 우리 연구센터가 있는 중국이 훨씬 말이 잘 통했거든.”

 

S는 또다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베이징에 있는 연구센터로 가는 길에 잠시 머물렀던 시설에서 사고가 있었다네. 자세하게 그것이 어떠한 사고였는지 말해주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서 그 둘에게 뭔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 그리고 그들은 보호 시설에서 도망쳤다네. 우리는 곧바로 추적하기 시작했고 김미현은 회수할 수 있었는데, 그 아이는 어떤 남자가 데려갔다고 하더군.”

 

S는 다시 김미현을 쳐다봤다. 김미현 또한 S를 쳐다보았다. 분명 이쪽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이쪽을 바라보는 K가 못내 불편했다.

 

"그리고 김미현에게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어.“

 

K가 갑자기 A를 바라봤다. 아니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A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심리적 동요를 할 여유조차 없다는 듯 S가 말을 이어갔다.

 

“그 아이는 시한폭탄 같은 거야. 그 아이를 찾아내야만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 수 있겠지. 지금 당장 옐로우 박테리아에 대한 치료제도 거의 없는 상황인데, 그 박테리오파지가 퍼진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리고 자네도 잘 알다시피, 이 질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어.”

 

S는 심각한 표정으로 A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마 아이를 찾고 있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닐 거야. 우리가 먼저 그 아이를 찾아야 하네. 도와주게. 에이치로.”

 

A는 당황스러웠다. S가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내가 뭘 도와줄 수 있겠나? 나는 그냥 평범한 학자일 뿐이야.”

 

A는 갑작스러운 이런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S는 그런 A의 심정을 잘 안다는 듯이 말했다.

 

“우린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네. 우선 그러한 낌새가 있는 사람들을 색출해 주게. 지난 몇 달간 자네를 계속 관찰해왔었어. 자네의 알리바이와 보고서도 확인하고 있었다네. 지금 유럽 지사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 일세.”

 

A는 당혹스러웠지만, 자신이 이 미션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이 자신을 불렀던 시점에서 이미 모든 설계가 되어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S는 A가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을 이곳에 부른 것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혹시, 만약 혹시라도 이 부탁을 거절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이 친구가 과연 나를 순순히 돌려보내 줄까.

밀려드는 생각들 때문에 A는 머리가 아팠다.

 

“혹시 이 사실은 또 누가 알고 있나?”

 

“울리히 센터장 이외에. 아무도 몰라.”

 

울리히뿐이라고? 불현듯 A는 어떤 인물이 떠올랐다. 분명하게 무엇인가가 잡힌 것은 아니지만, 희미하게 의심의 고리가 연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챕터 13>

 

2019년. 2월. 러시아 북서쪽에 위치한 바이러스 및 생명공학 연구소. 오승호가 강계 생화학 실험실에서 이곳으로 파견을 온 지 벌써 3년이 되어간다. 연구소와 숙소만 오가는 나날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날도 오승호는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실험실로 출근을 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가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은 그의 연구실이 위치한 미생물 표본 실험실과 저장실 밖에 없었다. 꽤나 큰 연구소였지만, 그는 다른 건물에서 어떠한 실험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는 못했다.

 

연구실에 들어가서 다른 연구원들과 가벼운 목례를 나누었지만, 그렇게 살가운 느낌은 아니었다. 오승호는 이런 냉랭한 분위기에 익숙했다. 북조선에서부터, 그는 항상 그를 은근히 따돌리는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다.

그는 연구 이외의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불편했다. 특히 이곳에서는.

 

러시아에 기술 교류 차원으로 와있긴 하지만, 그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북조선 출신의 연구자들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 오승호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표본 23. 오승호는 근래에 자신이 분석, 분류하고 있는 샘플 목록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시험관에 담겨있는 23번째 샘플을 집어 성분 분석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주 익숙하게 모니터에 나타난 데이터들을 차트에 입력하고 기존의 비교 군과의 차이를 확인했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만년설 속에 파묻혀 있던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었다. 특히 시베리아의 만년설에 묻혀있던 동물의 사체들에서 다양한 샘플들이 발견되고 있었는데, 발견된 샘플들은 대부분 이곳 연구소로 옮겨져 왔다.

 

2010년 이후, 얼음이 녹아내리는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면서 얼음 안의 미생물 역시 빠른 속도로 드러나고 있었고, 연구자가 모자랐던 러시아에서는 그나마 데이터를 뺏길 가능성이 낮은 북한에 연구자들을 요청했다. 이미 몇 차례 중요 샘플들이 중국으로 밀반출된 사례들이 있기에, 특히 북한에 인력 요청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오승호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샘플들을 나열해보며 오승호는 그의 아내를 떠올렸다. 형식적인 결혼이었지만, 상류층이었던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오승호가 러시아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신변을 보장할 수 있는 장인 덕분이었다. 조선노동당 소속의 장인어른을 두지 않았다면, 아마 오승호는 아직도 강계 연구소에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상황을 연출한 것은 리상철이었다. 그는 굉장히 치밀하게 조선노동당 내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구축하고 있었다.

 

오승호는 리상철이 지시한 사항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쓸 만한 재료가 발견된다면, 날래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

 

쓸 만한 재료. 구체적으로 언급은 한 적 없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오승호도 잘 알 수 있었다.

 

과연 그런 재료가 쉽게 발견이 될까. 그리고 발견이 된다 한들 이곳에서 무사히 빼돌릴 수 있을까.

 

우선 활성화될 가능성이 있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오승호는 그날도 얼어붙어 있던 동물들의 사체에서 미생물을 찾아내는데 집중하기로 하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의 러시아 연구원들 사이에로 익숙한 얼굴이 오승호를 향해 다가왔다. 북조선에서 파견된 연구원은 오승호 이외에도 네 명이 더 있었다. 표면적 이유로는 선진 기술을 배워 조국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언제 망명을 시도할지 모르는 북조선 출신의 연구진들을 서로 견제하는데 더 의미를 두고 있었다.

 

성큼성큼 오승호를 향해 다가오는 김승철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었다. 삭막한 이곳에서 오승호가 그나마 살갑게 지내는 동료였는데, 항상 차분한 성격이었던 그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정신도 잃어버린 듯, 어수선한 차림으로 오승호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오? 얼굴 꼴이 말이 아닌데.”

 

김승철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초조한 표정으로 오승호에게 말했다.

 

“오 동무. 리상철 동지가 숙청되었소.”

 

“뭐?”

 

오승호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자 다른 연구자 몇 명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오승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김승철에게 말했다.

 

“아니, 언제? 그리고 동무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소?”

 

김승철은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동안 강계와 직접 연락을 하고 있었소. 이곳의 상황 보고 겸...”

 

오승호는 잠시 멈칫거렸다. 김동무가 프락치였다니... 하지만 그것보다 리상철의 죽음으로 이어질 파장이 더 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요?”

 

김승철은 입술을 깨물었다. 임무와 생존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직접 연락을 할 수 있었던 위성 통신기가 있는데, 어제 저녁부터 연락이 끊겼소... 이건 아주 좋지 않소. 리상철 동지는 평소 미국과의 평화노선을 주장했지 않소?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됐다면, 평화노선은 물 건너 간 거지요. 아마 강경파에서 손을 쓴 게 아닐지...”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미관계는 좋지 않았었나. 그다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아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우선 기다려 봅시다. 엎드려 있어야지 별 수 있겠소.”

 

오승호는 김승철의 정보가 잘못된 것이기를 빌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좋지 않은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결렬되었다는 뉴스가 그날 오후 메인 기사로 흘러나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합의 결렬 그 이전부터 북조선에서는 온건파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외국 왕래가 잦았던 연구자들, 비교적 외국의 정세에 밝고 교류에 온건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지식인들과, 그들을 기반으로 권력을 잡고 있었던 리상철은 우선 숙청 대상에 속해있었다고 했다.

 

북조선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오승호를 비롯한 북조선 출신의 연구자들은 하루하루를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은 버려진 것인가. 아직 우리가 쓸모 있다고 생각했다면 북조선으로 불러들였지 않을까. 혹은 그 반대로 처리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이렇게 방치하는 것이 어쩌면 처분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공백인 것일까.

 

차라리 망명을 해야 하는 것을 아닐까. 아니면 자발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그들이 생존에 대한 고민 때문에 갈등을 하고 있을 때에도, 녹아가는 동토에서 발견된 샘플들은 꾸준히 연구소로 반입되고 있었다. 차라리 연구에 매진하는 것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오승호는 연구에 더욱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리상철이 숙청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오승호는 저온으로 보관 중인 박테리아 샘플 중에서 활성화된 개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일정 온도로 샘플을 해동시켜 활동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적정 양분과 습도, 온도 등을 조절한다. 대부분 활성화되지 못하고 DNA 흔적만을 남긴 비활성화 상태인데, 그날 증식 가능성을 보이는 박테리아 샘플을 발견하게 되었다.

간혹 이렇게 활성화되는 경우가 있기에 연구 목록을 작성해서 보고서로 정리를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보고서 작성을 위해 샘플을 다시 측정했을 때, 오승호는 데이터 수치를 보고 약간 놀라게 된다.

 

이렇게 번식 속도가 빠른 세균이 있었나?

 

최적의 조건에서 20분마다 두 배의 수로 증식하는 균류도 있었지만, 새로 발견한 이 샘플은 단순 계산으로도 증식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오전에 확인했을 때의 개체수에 비해, 오후에 확인했을 때의 개체 수가 10만 배 이상으로 이상증식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영양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정 수 이상으로는 늘어나지 않겠지만, 이 속도는 상식을 아득히 넘어선 수준이었다.

 

리상철이 말했던 쓸 만한 재료를 발견한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보고할 곳도 사라졌으니...

 

오승호는 자신의 악운을 탓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샘플과 데이터는 러시아에서 알차게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상의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시오. 나는 당신 편이니.”

 

오승호는 과거 언젠가 들었던 그 말과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누구였더라...

 

분명 스쳐 지나가며 만났던 학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슨 학회였더라... 아. 세계 미생물 학회에서 만났던 독일 연구자. 울리히 뭐였는데...

 

오승호는 한참 동안 자신에게 제안을 했던 그 남자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맞아... 분명 내가 발표했던 자료에 큰 관심을 보였던, 울리히 베네르트! 맞아. 정치가로 유명한... 그 남자.

 

오승호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이 신종 박테리아 샘플이 어쩌면 그를 살릴 수 있는 카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오승호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떻게 울리히에게 연락을 하지. 그가 주었던 명함을 아직 가지고 있었던가.

아마 이곳에서 인터넷을 사용한다면 금세 발각될 것이다. 김승철의 위성 통신기는...? 하지만 김승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가려 하던 참이었다. 문을 열던 오승호는 문 앞에 서있던 김승철을 보고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니, 김 동무. 언제부터 여기 있었소?”

김승철은 오승호를 비장한 표정으로 노려보고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지요.”

 

오승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김승철은 그런 오승호를 보고는 어둠으로 둘러싸인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손짓을 했다.

 

“아니. 당신. 어떻게 여기에..?”

 

김승철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김미현이었다. 북한에서 소식이 끊겼던 아내를 눈앞에서 마주하게 된 오승호는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들어가시죠.”

 

방안으로 들어온 김승철은 입을 열었다.

 

“동무가 아마 나를 믿지 못할 거 같아서 비밀리에 모셔왔소. 이제 우린 한배를 탄 거요.”

 

오승호는 김승철과 김미현을 빤히 바라봤다. 오랜만에 만난 아내는 핼쑥해져 있었다.

 

“당신 잘 지냈소?”

 

오승호는 아내에게 물었다. 김미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한눈에 보였다.

 

“오 동무. 우리에게 이제 선택지가 없소. 조국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처형당할 거요. 리승철 동지에 관련된 사람들은 대대적으로 숙청되고 있소. 그다음이 우리 차례요.”

 

“...”

 

“동무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눈치채고 있었을 거라 믿소. 나는 리상철 동지에게 직접 지령을 받고 있었소. 이곳에서의 연구 성과를 보고하는 것 이외에도 다른 동무들의 근황, 이곳 연구소에서 중점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실험 같은 것들을 보고하고 있었소.”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역시 김승철은 단순한 연구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리 동지가 숙청당한 이상, 강계 생화학연구소 출신 동무들은 우선 정리 대상에 있소. 게다가 핵심 역할을 했던 나나 오 동무 같은 경우는...”

 

그 이상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승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대안이 있소? 망명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김승철은 냉정하게 오승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맞소. 동무도 생각하고 있었을 테지만, 우리가 살려면 망명밖에 없소.”

 

오승호는 맥이 풀렸다. 역시. 이 방법밖에 없는 것인가. 그는 김미현을 바라봤다. 김미현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오승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에서 우리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지 않은 지금밖에 없소. 강제송환 당하기 전에, 먼저 움직입시다.”

 

 

 

 

얼마 후, 세계 각국의 뉴스에서 러시아 변방에서의 소형 핵미사일 폭발 사고 소식이 흘러나왔다. 러시아에서 개발하고 있던 소형 핵미사일 연구소가 폭발했다는 기사였는데, 이상한 점은 인근 국가들에서의 방사능 수치는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에 이 사고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잊혀지고 말았다.

그것이 생화학연구소에서 발생한 폭발이라는 것은 결국 러시아 내부의 극비사항으로 취급되어 일반 언론에는 철저하게 유출이 차단되고 있었다. 그 폭발로 인해 그곳에서 연구하던 미생물들의 아카이브가 사라졌다. 그와 더불어,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던 북한 출신의 연구원들도 사라지게 된다.

 

 

 

 

 

 

 

 

 

 

<챕터 14 >

 

L과 O는 C를 따라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수많은 컨테이너 박스들이 쌓여있었다. C는 CCTV와 경비원이 없는 길을 따라서 L과 O를 안내했다. 컨테이너 박스들 중 가장 안쪽에 놓여 있는 박스 앞에 도착하자 자물쇠로 문을 열고 둘을 안내했다.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서자 나무로 짠 상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C는 그중 맨 오른쪽 상자의 한구석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상자처럼 보였던 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고, 안쪽에는 꽤 큰 공간이 이어져있었다. 그 안쪽에는 이미 두 명의 밀항자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자그마한 손전등으로 빛을 비추며 담요를 둘러싸고 앉아서 C가 가져다준 것으로 보이는 건식을 먹고 있었다.

 

“서로 인사하고 쉬고 있어. 다음 이송은 이틀 뒤니까, 그때까지는 이곳에 있다가 다른 컨테이너 안에 들어가서 이동할 거야. 변기는 저쪽 너머 구석에 있고, 아침에 비워줄게. 먹을 건 일단 이걸로 만족하게. 항생제와 봉합도구도 여기 있어.”

 

C는 L과 O에게 건식 식료품과 항생제가 들어있는 유리병과 주사기를 건넸다. 폐허에서 어쭙잖게 구한 물건이 아닌,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는 제품이었다.

 

L은 C가 이러한 형태의 밀항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모든 준비와 절차가 C의 단독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체계적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나름 브로커를 통해서 몰래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감시가 그다지 철저하지 않은 점도 이상했다. 이 정도의 보안 수준이라면 굳이 안내를 받지 않고서라도 L 혼자서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석연찮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L은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우선은 현재의 상황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L은 한쪽 구석에 앉아 상처를 감았던 붕대를 풀었다. 퍼렇게 부풀어 오른 환부가 이미 세균에 감염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번 O가 발라줬던 고약이 별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더 늦기 전에 약을 구할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우선 항생제를 갈라진 살 주변에 나누어 주사했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오래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바늘과 실을 꺼내들었지만, 마취제 없이 맨 정신으로 상처를 봉합하자니 손이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O가 그런 L의 손을 꽉 감싸 쥐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L의 손에서 바늘을 빼어간 O는 능숙하게 바늘에 실을 꿰어 넣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L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O를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O는 차분하게 갈라진 살을 꿰매기 시작했다.

 

먼저 와있던 두 명의 사내가 그런 L과 O를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L은 문득 눈을 떴다. 언제 의식을 잃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O가 치료했던 상처는 깨끗한 천으로 잘 감싸져 있었다.

 

O는 L의 맞은편에서 담요를 덮고 앉아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총알처럼 보이는 무엇이었지만, L은 굳이 그것이 무엇인지 O에게 묻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K가 준 물건이겠지.

L은 O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O는 L을 올려다봤지만, 곧 다시 총알 모양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L은 O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앞으로 어떻게 이 상황들이 흘러가게 될까. 나와 이 아이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어두운 컨테이너 안의 모인 이들은, 자그마한 전깃불에 기대어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L과 O가 컨테이너에 들어온 지 이틀째 새벽, C는 꽤 많은 양의 비상식량과 물, 그리고 담요를 가져다줬다. 그 사이에 컨테이너 인원은 여덟 명이 더 늘어서 열두 명이 되어있었다.

 

“오늘 아침에 컨테이너를 싣고 출발할 거야. 자네들을 태운 화물은 유럽행 중국 횡단철도(TCR-Trans China Railway)로 운송될 예정이야. 18일 정도 걸릴 거고, 도착지는 벨기에 안트베르펜(Antwerpen)이라는 곳이네. 거기서 화물차량으로 E40 고속도로를 타고 영국으로 넘어갈 수 있을 걸세. 도착하면 그쪽 친구가 자네들을 안내해 줄 거야. 부디 자네들 운이 좋기를 빌어.”

 

이윽고 문이 닫히고, 긴 이동이 시작되었다. L은 이러한 기다림의 시간이 익숙했다. 어둡고 공기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서 답답하긴 했지만, 새로운 나라로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 스스로도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었지만,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큰 무게로 그의 어깨 위에 놓여있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O는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이런 환경이 이 아이로 하여금 무엇인가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더군다나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리가 없다.

 

처음 이틀간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처음에는 같은 우리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과의 갈등도 염려되었지만, 그들 역시 힘든 상황에서의 갈등은 원하지 않는 듯했다. 모두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처음 크레인이 그들이 타고 있는 컨테이너 박스를 집어서 옮길 때, O는 L에게 꼭 달라붙어있었다. L은 O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L은 O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해서 생각해보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신들은 어디에서 왔소?”

 

덜컹거리는 컨테이너 안의 시간은 너무나도 더디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 긴 공백을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는 후이족(회족, 回族)이오. 소수민족이지요. 사실 소수민족이라고 해도 한족들과 외견상 별 차이는 없지만.”

 

L 역시 후이족은 잘 알고 있었다. 상업에 능한 사람들. 유대인 상인들과 더불어 가장 이윤에 밝은 아라비아 상인의 후예들로 유명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회교도(回敎徒, 이슬람교)요. 전염병 사태 이후에 차별이 심해져서...”

 

그들은 전염병 사태 이전에 무역회사를 운영했다고 한다. 수완이 좋아서 회사가 한참 성장할 즈음에 전염병이 창궐했고, 그 이전까지는 큰 문제가 없던 종교적 원칙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고 했다. 이슬람 교리에 따라서 할랄(halal)만을 먹고 견디기에 인프라가 무너진 세상은 너무 가혹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들도 처음에는 회교도 중심의 집단에 속해있었지만, 결국 그 그룹도 와해되었기에 중국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자영업자, 운동선수, 운송업자 등, 아무래도 대부분 밀입국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자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각자 나름의 이유와 목적으로 중국 국경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L과 O의 차례가 돌아왔다.

 

“딸과 함께 살 수 있는 곳을 찾아왔소.”

 

L은 O를 바라보며 자신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아이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말을 조심하게 되었다. 가능하면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서 둘러댄 말이었지만, 말하고 나니 O가 자신의 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벽 밖의 삶은 아이를 데리고 살기에는 혹독했기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그들을 실은 컨테이너가 어딘가로 이동되고 있는 것은 끊이지 않는 덜컹거림으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 덜컹거림이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동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밤과 낮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분간이 되지 않는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가능하면 사람들과 희망찬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두가 말을 잃어갔다. 빛도 전기도 들지 않는 곳에서, 오로지 작은 전등에 의지해 시간을 보내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산소마저 부족해서 멍한 상태가 이어져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식욕마저 없어졌기에, 처음 챠이가 넣어준 건식들도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았다. 다들 그저 눈을 감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누워있던 L은 이상한 정적에 눈을 떴다. 덜컹거림이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차가 멈춰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열차가 멈춘 것을 눈치채고 몸을 일으켰다. 전등을 끄고 숨을 죽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참을 숨죽이고 있자 컨테이너 밖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차량이 움직이는 소리, 사람들의 두꺼운 발자국 소리, 무엇인가 둔탁한 것들이 부딪혀서 나는 금속음 소리 등이 점점 크게 들렸다.

 

꽤 많은 사람들이 컨테이너 밖에 몰려들고 있었다. 컨테이너 안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불안한 눈빛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안쪽 문을 바라봤다.

 

컨테이너 바깥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나무판자로 만든 가벽 너머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벽 두드리는 소리, 무엇인가를 뜯어내는 소리 등이 컨테이너 안쪽까지 울려 퍼졌다.

 

밖의 사람들은 숨겨진 문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에 텅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입구를 찾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챠이가 이야기했던 브로커는 아닐 것이다. 브로커들이 입구를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L은 슬며시 품으로 손을 옮겼다. 사냥용 나이프에 손을 얹고,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입구의 나무 문이 덜컹거렸다. 아무래도 입구를 찾은 모양이다.

 

- 쾅! -

 

갑작스럽게 나무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들어온 강한 조명 불빛들이 L의 눈을 때렸다.

 

“ Don't move!"

 

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들은 L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외치고 있었다. L이 간신히 부신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총구가 그의 가슴팍을 향하고 있었다.

 

온통 흰색 보호복을 온몸에 두른 침입자들은 L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리를 질렀다. 뜻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들이 기다리던 브로커가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반항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컨테이너 안의 모든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L 역시 빈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흰색 보호복 차림의 사람들은 컨테이너 안쪽의 상황을 확인하더니 한 사람씩 컨테이너 밖으로 끌고 나갔다.

 

‘어디서 꼬인 거지? 국경 감시단인가... 설마 신죠 컴퍼니?’

 

L은 양손을 머리에 얹은 채 컨테이너 밖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굴렸다. 차량에서 강한 조명이 컨테이너 안쪽에서 나온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기에 제대로 주변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예닐곱 명 되는 사람들이 흰색 방호복을 입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자동화기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L은 순순히 그들이 이끄는 데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어쭙잖게 움직였다가는 벌집이 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들이 누군가를 특정해 찾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리고 난폭하게 행동하지는 않았기에 L은 다소 마음이 놓였다.

 

O는 L의 손을 잡았다. L 역시 O의 손을 꼭 감쌌다. L은 이상하리만큼 평안한 마음으로 O를 바라봤다. O 역시 L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챕터 15>

 

L은 산속에서 자랐다. 이상하리만큼 커다란 나무들로 둘러싸인 작은 흙집이었다. 철이 들 무렵에는 이미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숲에서의 삶은 끊임없는 일의 반복이었다. 텃밭을 가꾸고 사냥을 한다. 동물의 가죽을 말리고 고기는 연기에 그을려 보관한다. 날마다 둘레의 울타리를 확인하고 보수한다. 덫이나 칼, 활 같은 사냥 도구들은 날마다 손질하여 망가지지 않게 한다.

L은 그런 반복이 싫지 않았다. 묵묵히 할 일을 반복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냥꾼이었다. 아니,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추측하건대 사냥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단순한 사냥꾼이라고 하기에, 그의 아버지는 할 줄 아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L의 아버지가 L에게 가르쳐준, 나무줄기와 대나무로 만드는 트랩들은 큰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다.

효율적으로 다리에 구멍을 내어 걷지 못하게 하는 트랩들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동물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닌,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었다. 한 명의 다리를 못 쓰게 만들면, 적어도 두세 명의 발을 묶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고안된 것들이었다.

다수의 인간을 상대하며 도망을 치기 위한 전형적인 트랩들. 그의 아버지가 과거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전문적인 전시 상황 속에서의 생존 기술들이 몸에 익어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렸던 L은 이러한 생존 기술들을 왜 익혀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습득할 수밖에 없었다. L의 아버지는 L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대부분이 숲속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는 마치 그가 자신의 아이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L을 가르쳤다.

그의 아버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 행동으로 보여주곤 했는데, 가끔 그가 입을 열 때에는 항상 반복해서 하는 말이 있었다.

 

“리. 항상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 언제든 떠날 수 있게 꼭 필요한 것만을 먼저 생각하렴.”

 

왜 그의 아버지가 그 말을 입버릇처럼 했는지 어렸던 L은 이해할 수 없었다. L이 그의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다.

 

L의 어머니는 거의 집에만 있었다. 아니, 숲 속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L의 아버지와는 달리, 그녀는 L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려고 애썼다. 그녀가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의 풍경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서, 그녀는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L에게 해주었다.

 

L은 그의 어머니가 생일 때 입었던 옷을 떠올리곤 했다. 어머니 고향의 전통 복장이라고 했지만,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든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살기 힘들었던 고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나왔을 때, 그녀가 가져올 수 있었던 짐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그 전통 의상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중국에서 고향을 그리며 구매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도시 노동자로 힘든 생활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다가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서 숲으로 들어와 L을 낳았다고 했다.

 

가끔 L은 그의 부모와 함께 산 아래의 마을로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내려가곤 했다. 주로 동물의 가죽을 조미료나 실, 바늘 같은 생필품들과 교환하기 위해서였는데, L의 어머니는 그 나들이를 꽤나 좋아하셨다.

나들이를 마치고 산속의 흙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는 자신의 고향 음식들을 만들어 주곤 하셨다. 팥고물을 입힌 떡이랄지, 곱게 간 녹두와 돼지고기, 기타 야채를 넣고 돼지비계 기름에 지진 음식들이었다. L과 아버지는 맛있게 먹었지만, 어머니는 항상 재료가 부족하다며 아쉬워하시곤 했었다.

 

L의 어머니가 그녀의 아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L의 아버지는 작업실에 들어가 나뭇조각을 깎곤 했다. 한 손에 잡힐만한 크기의 나무에 사람의 모습을 새기곤 했었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지금도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지만, L의 아버지가 틈틈이 깎아놓은 조각상들은 방 한쪽 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평소 L은 아버지의 작업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가끔 사냥도구들을 손질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작업실에 들어갈 때면, 조각상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가급적 빨리 그 방에서 도망쳐 나오곤 했다.

그렇게 잘 깎은 조각들은 아니었지만, 그 조각상들은 꽤나 정성스럽게 만들어졌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그것들을 만들었는지 말해주지 않았지만, L은 조각상들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를 통해 짐작해보곤 했다. 그것은 즐거움이나 그리움이 아닌, 그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L이 16세가 된 해였다. 그날도 L은 사냥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덫에 걸린 작은 동물들을 잡아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그날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멀리서도 보이는 흙집의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하다고 생각될 만큼 조용했다.

 

그의 자그마한 집 앞에는 도시에서나 가끔 볼 수 있었던 커다란 지프차가 서있었는데, 평소 도시에 나갔을 때 봤던 삼륜차와는 많이 달랐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니 군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의자에 앉아 L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L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화를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두 군인들은 할 말이 다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를 바라보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중 한 명이 L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L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L의 아버지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 말 하지는 않았지만, L은 그 눈빛을 종종 봤던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바라볼 때의 눈빛이었는데, L은 그의 아버지가 왜 자신을 그렇게 바라봤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구석에서 조용히 울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그의 아버지는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미리 챙겨놓은 짐을 들고는 조용히 사라지려 했다. L도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나서려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 둘은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엄마를 잘 부탁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눈빛은 L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L은 고개를 끄덕였다. L의 아버지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문을 열었다.

 

L은 가끔 그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그의 아버지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남긴 지식과 경험들은 L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했다. 그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의 4년 동안, L은 그 집에 머물렀다.

숲속의 흙집을 떠나기 전, 언젠가는 그의 아버지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능하면 깨끗이 집을 정리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가 남긴 조각상들은 기름을 먹이고 한곳에 모아서 천을 덮어두었는데, 그제야 L은 자신이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것만 같은 홀가분함을 느끼게 되었다.

 

혼자가 된 그는 도시로 향했다. 그 자신조차 그가 뭘 하고 싶은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숲에서의 삶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산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의 어머니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도시에서는 어머니의 고향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80년대에 들어와 자유시장 체제로 경제구조를 변경한 이후, 중국에서는 많은 자본가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경제 팽창 시기에 나타나는 인권 문제와 환경파괴, 인플레이션 등 격동의 한복판에 L 역시 놓이게 되었다.

L은 동물의 가죽을 다루는 상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숲에서의 경험을 통해 가죽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던 그에게, 가죽 제품을 만드는 수공예 공방은 꽤나 괜찮은 직장이었다. 임금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L은 자신의 삶에 꽤 만족할 수 있었다.

공방의 장인에게는 외동딸이 있었지만 가업을 이을 아들이 없었다. 공방 주인의 입장에서, 일도 잘하고 듬직했던 L은 이상적인 사위 후보였다. 시간이 흘러 L은 공방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되었고, 이듬해에 딸을 얻었다. L은 이 행복한 생활이 계속될 것으로만 믿었다.

 

그들의 불행은, 의외의 곳에서 오게 되었다. 2008년에 베이징 올림픽이 예정된 이후로, 도시는 대대적인 정비 사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외곽에 있었던 L의 보금자리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언젠가부터 근처에서 살던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L의 가게가 위치해 있던 거리에도 불량배들이 나타나 흉흉한 분위기를 연출하곤 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보상금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쫓아내고 있었는데, 이 모든 불법적 상황들은 도시 미관 개선이라는 명목 아래에 마구잡이로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 L의 장인과 부인은 불안에 떨며 이사를 준비하려 했다. L 역시 가족의 안전이 마음에 걸렸기에 그 마을을 조용히 떠나려고 준비했지만, 상황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철거용역들이 사람들을 쫓아내는 방법은 다양했다. 그중에서 특히 L이 못마땅했던 방식은, 저녁시간마다 소음을 내는 저열한 방식이었다. 조용한 숲속에서의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녁시간에 들려오는 소음들은 L로 하여금 조용히 떠나려던 그의 마음을 접게 만들었다.

 

소음은 주로 이미 떠난 빈집들의 유리들을 깨는 소리이거나 철판을 때리는 소리들이었기에, 미리 그들이 소란을 피울 다음 장소를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L은 그 특정 몇 지역에 간단한 트랩을 설치했다. 죽을 정도는 아닌, 적당히 부상을 당할 정도의 트랩이었다.

처음에는 철거용역들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몇 차례 수모를 당한 철거용역들은, 이러한 방해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기 시작했고, L의 가게 또한 용의선상에 오르게 되었다.

 

가게에 무작정 들이닥쳐 시비를 거는 불량배들을 가만히 놔둘 만큼 L은 자비롭지는 못했다. 몇 번의 시비가 오갔고 몇 명의 부상자가 나오자, 철거용역에서도 회유로 방법을 바꾸게 되었다.

L은 결국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이 용역 철거업체에 포섭되었는데, 그것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L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L은 훗날 건설사로 탈바꿈하는 이 업체에서 일하게 된다.

 

불법 철거 용역회사였던 L의 회사는, 베이징 올림픽을 겪으며 멀쩡한 건설사로 포장된다. 급격하게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력과 더불어 초호황이었던 건설업종의 유망한 회사로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뒤로는 불법적인 일들이 횡행했다. 특히 이권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유사 건설사들 사이의 알력 다툼은 더욱 심해졌다.

 

L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역할을 주로 처리했다. 주로 상대 업체의 핵심 인사나 꼭 처리해야 하는 상대를 조용히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번 타깃을 정하면 며칠이든 상대방의 동선을 파악하고 완벽한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리곤 했기에, 밖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들이 많아졌다. L은 언제나 조용하고 확실하게 타깃을 제거했기에, 그가 회사 내부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더라도 딱히 그를 제재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 내부에서 L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어갔다. L은 그렇게 그림자 속으로 조금씩 사라져갔다.

 

L은 자신의 가족이 안전하게 살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럴 때면 L은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다. 아마 그의 아버지도 자신과 같은 선택을 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만들었던 조각들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까. 혹시라도 아버지가 그 흙집에 돌아와 그 조각상들을 발견하지는 않았을까.

 

죄책감 가득한 눈빛으로 조각상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신도 그런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고, L은 문득 생각했다.

 

 

 

 

 

 

 

 

 

 

<챕터 16>

 

L과 O는 불법 이민자 보호소로 이송되었다. 황무지 한가운데에 있는, 허술해 보이는 건물에 도착하자, L은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어찌 됐건, 이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나라에 와 있었다. L은 그것만으로도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게다가 이 정도의 허술한 경비 시설이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호시설 안에서의 생활은 단순했다. 먹고 자고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하루가 반복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제공했고, 정해진 시간에 소등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L의 상처를 봐줄 수 있는 의사도 있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O가 해준 응급처치를 보고는 의사도 꽤나 놀라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살아남았구나.’

 

지난 며칠간의 시간이 지독히도 길게 느껴졌다.

 

‘김미현은 살아 있을까. 왕은 무사하겠지.’

 

L은 한시름 놓게 되자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곳을 빠져나가서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도 생각해야 했기에, 우선 당장은 좀 더 몸이 회복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머물고 있는 수용소의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L과 O 같은 밀항자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씩 새롭게 시설이 들어왔다. 처음 L과 O가 갇힌 30평 남짓 되는 창살 방은 하루에도 몇 명씩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그들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어디로 사라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L과 O도 곧 어디론가 이송될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침울한 표정으로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급 시간과 세면 시간 이외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적막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아니면 우울해 보이는 O를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L은 자신의 이야기를 O에게 하기 시작했다.

 

“하나야. 곧 괜찮아질 거야. 곧 나가게 될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

 

수용소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L은 O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L은 용서받고 싶었던 것 같았다. O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의 말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따금 손을 꼭 잡아주는 O의 손길이 L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내 어머니도 북한 분이셨어. 어머니가 가끔 고향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었단다. 우리 어머니도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으로 넘어왔다고 하셨어. 자세한 것은 잘 기억나진 않지만, 가끔씩 전통의상을 입고 계신 것을 본 적이 있었어. 그 기억만큼은 아직도 생생해. 하늘하늘한 저고리와 치마가 현실의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느꼈었단다.”

 

L은 O를 바라봤다. L은 문득 자신이 O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딸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아마 O와 좋은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L은 전염병 사태가 터지기 이전의 삶을 돌이켜 보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의 연속이었다고는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가족을 잃게 된 것도 자신의 행보 때문은 아니었을까.

O와 K를 만나기 전까지 그를 괴롭혔던 죄책감이 다시 슬금슬금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가족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O와 함께 하기로 했던 이 여정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 자신의 마지막은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지, L은 조용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그의 아버지도 지금의 자신과 같은 고민을 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과오를 속죄하기 위해 떠난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아버지의 조각상들이 떠올랐다. L은 자신도 그러한 조각상을 깎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손에 죽어간 사람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마도 그의 아버지도 그러한 마음에서 그 조각상들을 깎았을 거라고, L은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외면하고 싶었던 생각들을 마주하기로 했다.

 

 

 

 

 

O는 K와 오승호를 떠올렸다. 오승호와 K의 손에 이끌려 눈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러시아와 핀란드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 여기저기로 옮겨 다녔는데, 그들은 대개 O를 거추장스러운 짐처럼 취급했다. 오승호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언제나 혼자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유일하게 K만이 그녀를 보살펴주었다.

 

짧았던 북유럽 안전가옥에서의 생활은 살면서 거의 유일하게 느꼈던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곯은 배를 부둥켜안고 잠들 필요도 없었다. K는 항상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돌봐주었다. 언제까지나 그 행복이 계속되기를 바랐지만, O의 행복한 기억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오승호는 어느 날 밤 찾아온 사람들과 함께 사라졌다. 항상 홀연히 사라지곤 했기에 그렇게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날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분위기가 흘렀다. 오승호는 다음날 아침이 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가 지난 뒤, 남겨져있던 O와 K를 데리러 온 것은 어떤 외국인들이었다. 거칠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그들은 O와 K에게 짐을 챙기라고 말했다. 한눈에 보더라도 그들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O와 K는 또다시 먼 곳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며 짐을 꾸렸다.

그 외국인들이 입은 방탄조끼 가슴에는 푸른 십자가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파란색 십자가는 O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떠올리게 만들었기에, O는 가능하면 그 사람들과 같은 장소에 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무리의 인솔자였던 M은 종종 K와 O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격앙된 어조로 이야기를 할 때면, 예외 없이 K와 O를 노려보며 인상을 쓰곤 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K와 O를 대하는 태도가 거칠게 변해갔기에, O는 그들이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M을 비롯한 수행원들은 K와 O를 그저 처리하기 귀찮은 짐짝처럼 취급했기에, O의 적개심은 갈수록 커져갔다.

 

그들은 날마다 꽤나 많은 거리를 이동했다. 한참을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일정 장소의 숙소에서 하루 이틀 머물고, 다시 차로 이동하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그날도 그들은 어떤 숙소에 도착했는데, O는 유독 그곳이 이상하게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폐허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있는 단독 건물이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유쾌하지 않은 익숙함을 느꼈다.

모든 물건이 임시적인 것이었다. 휴대용 음식, 항상 사용하는 침낭, 책상과 선반 위에 수북하게 쌓인 먼지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이유 모를 익숙함이 O를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었다. O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자신이 좋아하는 총알로 만든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 박사가 사라지기 전에 O에게 준 목걸이였는데, O는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 자그마한 물건이 자신을 이 세상과 연결하는 끈처럼 느껴졌기에, 마음이 울적할 때면 그 목걸이를 꺼내서 만지작거리곤 했다. 이상하리만큼 매끈한 금속의 표면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M이 O의 손에서 목걸이를 낚아챘다. 그렇지 않아도 지루한 호위 임무에 짜증이 나 있었는데, 귀엽지도 않은 꼬마가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게 영 거슬렸다. O가 만지작거리던 것은 7.62mm 총탄이었다. 주로 AK-47에 사용되는 총알로, 자신들이 주로 쓰는 5.56mm 총탄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O는 자신의 물건을 돌려달라는 손짓을 계속했지만, M은 무시하고 계속 총알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걸었다.

 

그 순간 O는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M에게 달려들었다. M은 깜짝 놀라서 O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O는 포기하지 않고 M의 손을 붙잡고 깨물었다. 지금까지 O의 이러한 격렬한 반응을 본 적 없었던 M은 적잖게 당황했다. 말 못 하는 조용한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갑작스러운 격한 반응에 당황한 나머지 목에 걸었던 목걸이를 O에게 집어던졌다.

 

때마침 K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O의 괴성을 듣고 거실로 나와 그들을 말렸다. M의 손에서는 피가 흘렀고, O는 씩씩거리며 한참 동안 M을 노려보았다. 한 손에는 M이 집어던진 목걸이를 꼭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짐승 같았고,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그 기괴한 광경을 바라보고는 말을 잃었다.

 

 

다음날 아침, K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아침이 되면 용병들이 그들을 발로 툭툭 차며 깨우곤 했다. 그 섬뜩한 느낌이 소름 끼치게 싫었기에 아침이 되면 온 신경이 곤두서 있곤 했었는데, 해가 뜨고서도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녀와 O가 있는 방 밖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O 또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K는 몸을 일으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O를 방안에 남겨두고 거실로 나갔다. 잠시 뒤 K의 비명소리가 온 집안의 정적을 깨고 날카롭게 울렸다. O는 K를 향해 뛰쳐나갔다.

 

거실에는 M을 비롯한 두 명의 경비병이 쓰러져 있었다. K는 조심스럽게 M에게 다녀가서 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M의 몸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방탄조끼를 그대로 착용하고 있었기에 근무 중에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K는 공포에 몸을 부들거렸으나, 이내 용기를 내어 방안 곳곳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이송하고 있던 전원의 숨이 끊어져 있었다.

 

어떤 자는 경비 중에, 어떤 자는 휴식 중에 숨이 끊어진 듯 보였다. K는 그 장소에 조금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O의 손을 이끌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약간의 식료품만을 집어 든 채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가능하면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한참을 뛰다시피 도망친 뒤였다.

 

다시 그곳에 가서 무기와 식량을 가져오는 것이 나을지를 고민했지만 K 스스로가 총기를 다룰 줄 모를뿐더러, 사망한 이들의 원인이 짐작도 가지 않는 상황에서 그곳에 다시 돌아가는 행동이 그다지 현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건이었기에 K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O는 가만히 주저앉아있는 K의 얼굴을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O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있다는 느낌에 불현듯 창살 건너를 바라보았다. 밀입국 관리 보호소의 직원 하나가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마주치자 그 직원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잊고 있었던 바쁜 일이라도 있다는 듯이 사라졌다.

 

O는 불길한 예감에 소름이 돋았다. 옆에서 고개를 양팔에 파묻고 앉아있는 L을 바라봤다. O는 오승호가 자신에게 목걸이를 건네주며 신신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건 너를 지켜줄 부적이니 꼭 몸에 지니고 있도록 하렴.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된다.”

 

O는 L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마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O 자신보다는 이 아저씨가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사라져버린 K처럼 자신을 보살펴주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사라져 가는 것을 더 이상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O는, 자신을 지켜주는 부적을 L에게 건네주고 싶었다. O는 L이 고개를 들자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L에게 걸어주었다. 그리고는 L을 꼭 껴안았다. L은 O가 마치 자신의 딸처럼 느껴졌다. L 역시 O를 꼭 껴안았다. 앞으로 어떻게 자신들의 삶이 흘러가게 될지 예상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O가 사라진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L이 잠시 볼일을 보는 사이에, 마치 처음부터 그런 아이는 없었다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챕터 17>  

 

O는 덜컹거리는 차량 뒷좌석에서 눈을 떴다. 눈앞에 캄캄했기에 잠시 당황했지만, 얼굴 전체가 무엇인가로 덮여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것일까.

 

O의 양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마도 자신이 깬 것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심하게 덜컹거리고 있었기에 제대로 된 길 위를 달리고 있지 않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익숙했다. O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

 

좁고 깜깜한 방안에 혼자 앉아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둠이 어색할 때마다 짧게 깎은 머리를 어루만지곤 했다. 그 끝없는 정적이 이어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소리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문밖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익숙한, 알아들을 수 없었던 언어가, 다시금 O를 휘감았다.

 

 

 

 

 

A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S와의 대화 이후 A는 본인의 연구 이외에, 연구실 스텝들의 활동 정보에 대해서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연구원 개개인들의 출퇴근 및 휴가 시간, 연구 목록, 재정상황, 가족관계 등 수많은 개인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연구소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개인 정보들을 다양한 각도와 루트로 수집하고 있었다. 높은 확률로 발병할 수 있는 예상 질병과 유전적 특질까지, 평범하지 않은 개인 정보까지 샅샅이 조사당하고 있었다.

엄연한 불법이었기에 이러한 사실이 외부로 유출될 경우의 파장에 대해서도 걱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광범위한 개인 정보 수집 방식에 대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모든 불법 사찰들이 내부의 적을 찾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A는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수집되어 있는 자신의 정보를 열람하며 다시금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개개인들의 면역 상태와 항생제 내성 반응에 대한 정보도 세세하게 수집되고 있었는데, 이는 개인의 DNA 정보 또한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범위한 개인 정보 수집은 연구센터 내의 사물화 기기들로부터 수집되어 자동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들은 특정 허가가 내려진 극소수의 몇 명만이 열람을 하고 있었다. 센터장과 언노운으로 표시되는 누군가였는데, 신죠 컴퍼니와 관련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지만 이 건물 자체가 하나의 실험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니, 그때까지 품었던 여러 궁금증들이 한꺼번에 풀리게 되었다. 이 건물 안에 머물고 있는 모든 연구원들은 하나의 모르모트였다.

A는 지난 몇 달 동안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지가 달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고 S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A에게 이러한 권한과 미션을 준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센터의 이러한 상황들을 알고 있었을까.

A는 문득 E가 생각났다. E의 정보를 열람하며, A는 E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 이외에는 관심을 보이거나 개입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굉장히 냉정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활동 기록을 보니 그런 그의 성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 연구소에서 내부 비리를 고발했다가 퇴출당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 고발 사건으로 대학 등의 연구기관에서는 기피 대상이었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백신 센터에 들어오기 전까지 금전적 생활고 또한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항상 능글능글하게 시스템에 잘 적응하고 살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바른말을 하다가 고생을 많이 한 케이스였다.

 

A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정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신죠 컴퍼니는 이미 한참 전부터 연구원 개개인의 정보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아직 스파이를 찾지 못했다. 아니, 그 이전에 스파이가 있다고 믿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의심스러운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많은 정보를 불법적으로까지 모으고 분석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옐로우’와 관련이 있다면, 반드시 확인해봐야 한다.

 

개인 사찰에 대한 윤리를 접어두고서 의심의 눈초리로 연구원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니, 연구원 모두가 수상쩍은 부분들을 한두 가지씩 가지고 있었다. 센터 내부의 사람들 중 사건 사고 없이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허탈함이 몰려왔다. 원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인지, 이 센터가 이상한 것인지 이제 더 이상 분간할 수 있는 냉정함도 유지하기 힘들었다.

 

왜 굳이 나일까. 신죠 컴퍼니 내부의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석연치 않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A는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근래에 제대로 숙면을 취할 수가 없기에 항상 머리가 무거웠다. 아침부터 A의 전화기가 울렸다. 멍한 상태에서 E로부터의 전화를 받았다.

 

“에이치로. 울리히 센터장이 죽었어.”

 

E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지만, A는 E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이봐. 듣고 있나? 에이치로?”

E와의 통화를 마치자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직감할 수 있었다.

 

“울리히 이야기는 방금 들었네. 아무도 믿지 마. 그리고 지금 빨리 이쪽으로 건너오게.”

 

A는 숨이 턱 막혔다. 서둘러서 운전대를 잡고 신죠 컴퍼니로 향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파악할 새도 없이, 자신의 목에 걸린 목줄이 당기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S는 회사 로비에서 A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명은 이동하면서 하지. 우선 이쪽으로.”

 

S는 수행원 둘과 함께 A를 이끌고 건물 옥상을 향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헬리콥터가 그들을 맞이했다.

 

“울리히가 사망한 이상, 연구센터에 관한 정보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자네야. 만약에 자네마저 사고를 당하면 정말 곤란해져.”

 

날아오르는 헬리콥터 안에서 S는 A에게 말했다.

 

“우린 이제부터 벨기에로 이동한다네. 그쪽의 밀입국자 관리소에서 연락이 왔어. 어떤 동양인 하나가 신죠 컴퍼니에 연락을 해달라고 난동을 부렸다는 군. 이름은 리웨이라고.”

 

S는 꽤나 복잡하게 꼬인 이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입술을 깨물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중국발 사치품 밀반입 단속에서 붙잡힌 모양인데, 관리소에 따르면 그 친구가 어린 여자아이와 함께 컨테이너에 숨어서 밀입국하다가 붙잡혔다고 하더군.”

 

A는 눈이 크게 떠졌다.

 

“김미현이 말해준 남자의 인상착의와 흡사해. 우리는 그와 함께 있던 아이가 O라고 확신하고 있어. 그런데 그 아이가 사라졌다네. 리웨이라는 그 친구가 난리를 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밀입국 관리소에서는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쪽에도 누군가 있었던 모양이야.”

 

S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누가? 짐작 가는 바가 없나?”

 

“글쎄... 모두가 그 아이를 찾고 있어. 단순히 중국, 러시아뿐만 아니라 백신에 눈이 먼 다국적 제약회사들과 유럽의 국가들까지, 한곳을 특정할 수가 없어.”

 

A는 S가 일부터 특정 범위를 넓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벨기에의 밀입국 관리소에까지 손이 닿는 기관을 특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A는 입을 다물었다. S가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말해줄 리가 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L은 자신이 부린 난동 덕분에 별도의 독방으로 격리되어 있었다. O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L은 바로 탈출을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에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아무런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밀입국 관리소 직원에게 손짓 발짓을 하며 상황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밀입국 센터에서는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하루에도 수많은 밀입국자들이 들어오고 다시 추방당하거나 입국이 허가되는 절차들이 반복되고 있었기에, 어린아이 하나가 사라진 것을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아 보였다. 이렇게 형식적으로만 운영하는데도 문제가 없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반나절의 시간이 지난 뒤, 시간이 지날수록 O를 되찾을 확률은 낮아진다고 파악한 L은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관리소 직원 셋을 쓰러뜨리자 밀입국 관리소에서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무장한 직원들을 투입했다.

L은 쓰러진 직원 하나를 인질로 붙잡고 신죠 컴퍼니와 연결해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L이 알고 있는 한, O를 노리고 있는 집단은 신죠 컴퍼니밖에 없었다. 다행히 밀입국자 중, 영어와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기에 L의 요청 사항을 밀입국 관리소의 직원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짧은 대치 상황이 있은 후, 자신의 전달사항이 전해진 것을 확인한 L은 순순히 독방으로 잡혀 들어갔다.

 

L은 독방 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신죠 컴퍼니를 외쳤다.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L은 주머니에서 O가 준 총알 모양의 목걸이를 꺼내보았다. 누가 이 아이를 데려갔을까. 뭔가 자신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린 것 같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에 쥐고 있던 총알의 약협(탄피) 부분이 느슨하게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탄피 끝부분을 돌리자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는 낡은 쪽지가 들어있었는데, 뜻을 알 수 없는 숫자들이 적혀있었다. 때마침 독방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L은 쪽지를 다시 총알 안에 집어넣고는 뚜껑을 닫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직원들이 L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L이 안내된 곳은 접견실로 보이는 어떤 방이었다. 방안에는 아시아인 세 명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경호원처럼 보이는 건장한 사내 둘이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L은 의자에 앉아있는 말쑥한 남자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A와 S는 잠시 당황했지만, L은 곧 경호원들에게 두 팔을 붙잡혔다.

“이 중국인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S의 옆에 있던 통역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L의 말을 S와 A에게 전했다.

 

“당신들이 하나를 데려갔다. 당신을 베이징에서 봤다. 헬기를 타고 내려와서 사람들을 시켜 그 아이를 잡으라고 했던 것도 알고 있다...”

 

S는 얼굴을 찡그렸다. S는 A를 힐끗 바라본 뒤 통역에게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O를 데려간 것은 우리가 아니다. O를 우리가 데리고 있다면 왜 우리가 굳이 당신을 만나러 왔겠나?”

 

L도 S의 이야기를 듣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누가 하나를 데려갔단 말인가? L은 문득 방금 전에 발견한 총알 속의 쪽지가 떠올랐다. L은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방안의 모두가 L이 총알 안에서 쪽지를 꺼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 고재욱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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